❖ 로마서 스물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5:15-19
한 사람
성경이 말씀하는 죄란 원죄와 자범죄라는 여러 종류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원수로 삼고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증거가 모든 사람이 다 죽음 아래 있다는 것이고 그 죽음이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이렇게 죽음 아래 있도록 만드셨을까 하는 것을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14절)이라는 말씀을 통해 살펴 보았었다. 모형이란 어떤 실체를 보여 주는 하나의 본보기이다.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란 단순히 아담이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범죄자로서 본보기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가 취한 선악의 지식 나무를 아담이 취하여 여자와 함께 범죄한 것으로 죽음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앞으로 오실 자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담이 통로가 되어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여자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생명으로 살게 하실 것을 창세기에서 말씀하는 것이 모형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취하는 행위가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를 취하지 않았으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고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계속 생명의 관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유추가 가능한 것이라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선악의 지식 나무로 만들지 않으셔야 되었다.
이런 모순적인 문제 해결을 위하고 또한 선악과가 나쁘다는 선입견을 차단하기 위하여 신학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애초에 자유의지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또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용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이 자기 자유의지로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지 말았어야 했다든지 아니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막았어야 했다는 가정은 우리 인간의 죄악된 생각에서 나온 유추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의를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사망 아래 있게 된 것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면 그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를 죄 아래 가두어 두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시기 위한 약속이라는 것이다(갈 3:22). 즉 사망을 통과하게 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을 대조하면서 이 부분을 좀더 길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5-16절). “이 은사”는 무슨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선물’을 의미한다. 우리는 1:11에서 “신령한 은사”가 ‘복음’이라고 이미 살펴 보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어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은사”란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다.
16절에서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사실 이 말씀을 이 번역대로 이해하자면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많은 범죄를 행하여 의롭게 되는 것으로 착각되게 만드는 번역이다. 이 말씀을 다시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은사는 많은 범죄 후에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의에 이른다’는 뜻이다.
아담이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것은 아담 개인에게 국한된 죄가 아니라 아담이 통로가 되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그 아담 안에서 함께 선악과를 먹은 것이었다. 그 죄의 증거가 모든 사람이 사망 아래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문제를 말하면 아담이 대표가 되어 범죄를 저질러 우리 모든 사람이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 죄인이 되었다는 교리로 설명하는데 여기서 바울 사도가 전하는 말씀은 대표성의 원리가 아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의 대표성 원리로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의 원리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대표성의 교리로 설명하면 심각한 성경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죽음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대표로 죽으신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대속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묵시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함께 끌고 들어가서 죽으신 죽음이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성령께서 개별적으로 찾아가시는 믿음의 선물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묵시 속에서 완성된 십자가 은혜를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대표로 범죄하여 우리가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대표로 십자가를 지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대표의 원리에 의해 모든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아담을 통로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에 의해 우리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함께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것이기에 창세기의 사건은 과거 아담이 저지른 범죄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지식 나무를 취한 범죄를 고발하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으신 죽음이었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나의 죽음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바울 사도도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선언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의 대조에서 “많은 사람”이란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 안에서 십자가 죽음에 함께 참여하게 만드신 자기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많은 사람”이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언약 백성으로서 한 사람이다. 이제 바울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넘치게 주신 은혜를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7-19절).
하나님께서 사망이 왕 노릇하게 하시고 범죄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게 만드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오늘 우리가 사망 안에 있다는 것은 첫 번째 아담과 같이 죽음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죽음 안에 있는 자들을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죄인과 같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누가복음 3:21-22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는 죄인과 같이 되셨다는 뜻이고 죄인과 같이 되셔서 세례라는 십자가 죽음에 첫 발을 내 딛으실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며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누가는 바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족보의 시작과 끝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23, 38)
예수님의 오심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누가는 아담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그 위를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아담 위가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족보를 누가가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담으로 시작하여 아담으로 끝내시는 역사를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근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족보’를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톨레도트’인데 이는 ‘역사’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맺으신 창세 전 언약을 아담으로 시작하여 아담으로 완성하시는 역사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의 관점에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첫 사람 아담은 그저 살아서 생명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알아볼 수 있는 존재였지만 살려주는 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지 못하면 영생을 누릴 수 없는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묵시 속에서는 이미 완성된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 드러내고 설명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조장하신 죄의 조장자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언약을 위하여 죽음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그 최종적인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부활의 세계에서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라고 하였고 또 20절에서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다. 성도는 죄 가운데서 좌절하고 실패한 것으로 낙심하는 자가 아니라 더욱 넘친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감사로 사는 자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1201 강론/김영대).✞
롬29.0515-19 한 사람(20191201).pdf
'●──── 신약강론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1강 로마서 6:1-11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0) | 2020.01.13 |
---|---|
제30강 로마서 5:20-21 율법과 은혜 (0) | 2019.12.09 |
제28강 로마서 5:12-14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2) | 2019.11.17 |
제27강 로마서 5:5-11 하나님의 그 사랑 (0) | 2019.11.10 |
제26강 로마서 5: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0) | 2019.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