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비유 강론 32
마태복음 24:45-51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 예루살렘의 멸망을 근거로 삼아 세상의 끝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루살렘의 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끝, 즉 종말에 대해 미리 보여 주는 사건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있을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징조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상적인 삶이라는 죄에 매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 자신을 위한 삶에 빠져 있는 그것이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상태이며 그것이 곧 종말의 때를 인식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실상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죄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을 때에 노아가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에게 임했다는 것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죄 가운데서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언약 안에서 보여 주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씨라는 말씀을 뿌려 갈라내시는 작업을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후 예수님은 계속 몇 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신다.
44절에서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라고 말씀하신 이후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본문 상의 표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누가복음 12:41-48에 기록된 비유와 같은 병행구절로 본다. 이 비유의 시작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5-46절)라고 하셨는데 이는 44절과 연관된 문맥 속에 주어진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신다는 말씀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라고 하였는데 충성되다는 말은 신실하다, 또는 믿을만 하다는 뜻인데 누가복음에서는 같은 단어를 “진실한”이라고 번역하였다(눅 12:42). “지혜”에 대하여 구약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잠 1:7, 9:10)이라고 하였다는 점에서 지혜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마음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 지혜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 7장에서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는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지혜로운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결국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마음인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으므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종”(헬, 둘로스)이란 주인의 운명과 같이 하는 자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된 자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행하여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자이다. 그러면 “그 집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가복음에서는 “그 집 종들”(눅 12:42)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 ‘데라페이아’(therapheia)이다. 데라페이아는 봉사하다, 치료하다라는 ‘데라퓨오’에서 온 말로 ‘치료’(눅 9:11, 계 22:2), ‘수행원’, ‘식구’, ‘집안의 종’이라는 다양한 뜻이 있다. 즉 종(둘로스)은 집안에 죄에서 치료 받아야 할 식구(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하늘의 양식을 나누어 줄 자를 의미한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에서 “보면”이라는 말은 밭의 보화와 진주 장사 비유에서 “발견하다”(마 13:44,46)라는 말과 같은 단어(휴리스코)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찾다가 발견하였다는 뜻이다. 즉 주인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죄의 치료를 받아야 할 식구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나눠주는 종을 발견하면 그 종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복을 주신다는 표현은 복을 준다는 의미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복이 주어진 상태로 복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종이 복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7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소유”란 ‘휘팔코’는 ‘아래에서 시작하다’, ‘살다’, ‘존재하다’라는 뜻인데 ‘휘포트레코’(아래로 지나다)와 ‘알코마이’(시작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즉 소유란 ‘아래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소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긴다는 말씀은 하늘의 양식을 이 땅에 드러내는 그 모든 일들을 맡기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말씀은 단순히 전도나 선교의 사명을 맡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인이 하늘의 진리를 종에게 또한 그 종을 통해 그 사람들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충성되게 지혜 있는 종으로 주인의 일을 맡아서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그 집 사람들 역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주인에게 받아 들여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의 상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깨달은 제자들을 천국의 서기관으로 말씀하시고 또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51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1-52)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님은 이어서 악한 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48-51절). 여기서 “악한 종”이라고 할 때에 ‘악하다’는 말은 ‘무가치한’, ‘나쁜’, ‘해로운’이라는 말이다. 즉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아니라면 천국에는 가치 없고 해로운 종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만 용납되지 무가치하고 악한 종은 용납될 수 없는 나라이다.
왜 악한 종인가? 마음에 주인이 ‘더디 오리라’(크로니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대한다는 말이다. 더디 올 것이라는 것은 때와 시기를 정한다는 의미이다. 인자의 오심은 역사의 시간에 대한 문제가 아닌데 역사의 시간으로 한정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약속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이 이 때입니까?”라고 때와 시기를 물었다(행 1:4-7).
악한 종들은 때와 시기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여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악한 종들은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신다. 이 말씀도 우리가 술을 소주나 맥주로 이해하고 술을 먹으면 되느냐 안 되느냐 또는 술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신앙이 타락하였다는 문제로 받아들이면 본문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동료”(쉰둘로스)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자’, ‘함께 종된 자’라는 말이다. 동료들을 “때린다”는 말은 같은 주인을 섬기는 함께 종된 자들이면서도 주인과 같이 되어 자기 기준과 판단에 의해 벌한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술친구”라고 좀 의역을 하였는데 헬라어로는 ‘취하도록 마신다’는 뜻이다. 같은 주인을 섬기는 함께 종된 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주인과 같이 행세하며 자기 기준과 판단에 취하도록 만들며 그것으로 인해 서로 벌하며 율법으로 정죄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아닌 자기 선악의 기준에 취해서 사는 상태가 바로 하늘 나라와 상관없는 무가치한 종의 모습이라는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자의 오심, 종말의 상태는 악한 종들에게는 “생각하지 않은 날”이고 “알지 못하는 시각”이다. 즉 선악의 체계에서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들, 악한 종들에게는 인자의 오심이란 전혀 기대하지 않는 날이며 시각이다. 그러므로 종말은 악한 자들, 죄인들에게는 결코 종말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태이다. 아니 종말이란 기대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된 자는 종말을 아는 자이고 세상의 끝, 인자의 오심을 알고 생각하며 기대하는 자이다.
“엄히 때리고”라는 말은 성경 본문의 각주에 보면 “쪼개어 내고”라고 되어 있다. 두 갈래로 가른다는 뜻이다. 즉 주인이 오면 두 갈래로 갈라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의 오심 그 자체는 산 자와 죽은 자, 말씀이 된 자와 말씀이 되지 못한 자, 생명으로 하나가 된 자와 생명에 하나가 되지 못한 자로 갈라내시는 일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이를 갈 수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 그 주님을 모르는 상태에 있는 그것이 바로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6-21)
(20180401 강론/김영대).✞
비유32. 마 2445-51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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