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21:33-46 포도원 주인과 농부 비유

불편한 진리 2019. 4. 11. 11:59

❊ 예수님의 비유 강론 29


마태복음 21:33-46


포도원 주인과 농부 비유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 비유에서 첫째는 주인의 권위에 의해 자기 선택권이 없는 존재로 곧 둘째인 다른 하나를 자기 백성으로 불러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일을 위해 이 땅에 보내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권위로 의의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의 회개에 동참한 죄인들인 세리와 창녀들이 둘째 곧 또 다른 하나가 되는 은혜 안에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율법으로 영생을 쟁취하려는 자들이었기에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어서 두 번째 비유, “포도원 주인과 농부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 비유에서 나타내신 첫째가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되며 또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어떻게 도전하고 있는 지를 확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신다. 예수님의 비유인즉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33-36절)라고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다가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종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아들을 보내는데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37-39절)라고 예수님께서 비유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물으셨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절)라고 하였다.


이 비유에 대해서도 역시 많은 오해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 설교들로 넘쳐난다. 흔히 구원을 얻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고 드려야 할 성도의 열매, 즉 예배와 기도 또 전도나 헌금을 드리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경고를 주시는 비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비유의 첫 비유에서는 “천국은 마치 ~과 같다”는 식의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세 비유를 연결해서 마지막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으니”(22: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련의 연결된 세 비유는 같은 문맥에서 동일하게 천국에 대한 비유로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천국 비유이고 천국의 핵심적인 의미는 십자가로 드러내셨다.


비유의 상황 설정은 이사야 5:1-7의 메시지를 차용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상당 부분을 새롭게 구성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1-2)


 


주인이 농부들에게 자신의 종들을 계속 보내는 상황과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끊임없이 잘못 대우하는 모습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언약을 보여 주신 것은 인내하시며 계속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주인이 많은 종들에 뒤이어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을 통해 세상의 결국이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를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히브리서 기록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세상이 끝날 때쯤 되어서야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세상은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나타내신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과는 대립관계, 적대관계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아벨이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계열이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도전하는 계열에 의해 계속 죽임을 당하는 역사로 규정하셨다. 이스라엘은 이 역사 속에서 언약의 열매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죄인들은 스스로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였기에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비 언약의 계열이 언약의 자손을 제거하는 이 땅의 역사가 종말이 왔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 계신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 역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예수님이 2000여년 전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단순히 과거 역사 속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오늘날도 동일하게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역사에서는 계속 제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실체이다.


그들의 대답에 이어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2-43절). 이 말씀은 구약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21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1-24)


 


예수님은 자기 욕심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일을 위해 오신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 비유에서 말씀한) 첫째이시다. 오직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세상에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사는 존재가 오셨다는 것은 당연히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상태이다. 이는 곧 죄와 의의 충돌이며 죄인들과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쓸모없는 돌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히브리어로 ‘벤’)을 쓸모없는 돌(히브리어로 ‘에벤’)로 치부한 인간의 죄성을 언어 유희로 고발하신다.


모퉁잇돌이란 기준이 되는 돌이며 건물의 기초로 가장 먼저 놓이는 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집을 짓기 원하셨는데 그 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에 의해서만 건축되는 집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하여 스스로 건축자가 되어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버렸다. 하나님의 집은 예수님이 기초가 되어 지어진 집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지어지는 집이어야 한다. 즉 기초이든 건물이든 예수님과 같은 돌들로 지어진다는 뜻이다(참고 마 7:21-27).


그러므로 예수라는 모퉁잇돌에 의해 자신이 부정 당하고 깨어지는 자가 복이 있다. 모퉁잇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함께 돌이 되지만(구원) 이 복에 참여되지 않는다면 그 돌이 떨어지는 심판에 의해 흩어짐을 당할 것이다(심판). 모퉁잇돌 위에 떨어진 그들만 산 자이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지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만 결실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43절)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서지고 깨어진 자들이 산돌이신 예수님과 연결하여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지는 성도이며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본문의 마지막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45-46절)라고 하였다. 들을 귀가 없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공격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죽음을 이루시는 언약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것에만 집착하여 자기 포도원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주인이 모든 것을 갖춘 포도원으로 만들어 세로 준 것을 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일해서 얻은 열매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들을 죽여서라도 자기 소유로 삼고자 하였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율법을 행하여 천국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주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애써 잊고 싶었다. 이것이 악한 마음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자기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 자기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생활 안에서 챙기는 자기 의는 우리의 악함에서 나오는 죄악이다(20171029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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