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22:1-14 왕의 아들 혼인 잔치 비유

불편한 진리 2019. 4. 11. 12:11

❊ 예수님의 비유 강론 30




마태복음 22:1-14


왕의 아들 혼인 잔치 비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신 것을 통해 성전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누구의 권위로 이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비유를 연속으로 말씀하셨다.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 비유를 통해 첫째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임을 나타내셨고 두 번째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악한 농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으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셨다.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언약의 당사자가 죽임을 당하는 역사가 계속되어 왔으나 이제 십자가에서 언약을 성취하는 죽음으로 종말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비유로만 이해하였기에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제 예수님은 세 번째 비유를 말씀하신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즉 다시 비유로 대답을 하신 것이 “왕의 아들 혼인 잔치 비유”이다. 누가복음 14:15-24에 기록된 비유는 본 비유와 많은 유사성을 가졌으면서도 또한 서로 다른 문맥 속에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비유이다. 그래서 성경 학자들 중에서는 이 두 비유가 같은 내용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비유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 본문의 유사성 안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할 비유의 본질적인 뜻을 찾는 일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본 비유의 결론이 1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결론에 근거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은 많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쉽게 이해하여 우리가 예복을 잘 준비하여야 하는데 그 예복은 곧 우리의 예배와 헌신, 기도, 전도를 비롯한 주일성수와 정성스런 십일조인데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예복이 되도록 하자고 설교한다면 이 본문을 잘 이해한 것일까? 물론 ‘복음을 듣는 자가 많아도 구원을 얻는 사람이 적다’는 이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미가 이런 것인가?


이런 점에서 본문을 이해하는데 사실 많은 난제들이 있다. 예컨대 왕이 초청을 하였는데 거절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거절만 하면 됐지 굳이 청하는 종들을 잡아 죽였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또 거절을 하였다고 해서 그 동네를 불사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가? 또한 그 다음에 초청되는 손님들을 악한 자나 선한 자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누구를 의미하며 예복이 무엇인가? 과연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다 정리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비유의 핵심적인 의미를 말씀하고자 하신 그 한 가지에 집중하여 본문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이해하고자 한다.


이 비유의 내용인즉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2-6절)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는 천국을 잔치로 여러 곳에서 표현하고 있다(대표적으로 사 25:6-9).


왕은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고 종들을 보내서 청한 사람들을 오라고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였다. 그러자 다시 다른 종들을 또 보내어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오라고 초청을 하였으나 그들은 자기 일들에 바쁘다며 다 거절하였다. 심지어는 종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하였다. 물론 잔치들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이 잔치는 왕이 다 준비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잔치였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5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상관이 없으며 아예 관심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장사를 하러 갔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7-10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 동네”(헬라어로 ‘호 폴리스’)란 일반적인 동네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도시를 지칭하는 말인데 그것은 곧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기 위함이었으며 그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다. 그렇다면 혼인 잔치에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왕이 천국을 완전하게 갖추어 드러내신다는 뜻이며 이제 예루살렘은 내려진 심판으로 인해 성전이 없는 한 동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거기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거기서만 예배를 하고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들으시는 것처럼 가르쳤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 건물 중심의 종교 행위만 남았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한 율법적인 종교 생활과 같은 모습과 같이 한국 교회는 ‘대한유대교 장로회’가 되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는 온갖 종교 행위로 자기 의를 쌓아 천국을 도둑질하려는 상태이기에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유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9절에서 “네거리 길”(헬, 디엑소도스)이라고 번역된 말은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이스라엘 경계 밖으로 넘어갈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혼인 잔치에는 악한 자나 선한 자들로 가득 채워졌는데 “악한 자”란 헬라어로 ‘포네로스’(poneros)인데 ‘갈급한’, ‘가난한’이라는 말의 ‘페네스’(penes)에서 온 말이다. 그리고 “선한 자”란 스스로 선을 이룬 자가 아니라 ‘선함이 된 자’를 말한다. 즉 혼인 잔치는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와 선함이 된자들로 채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14:21에서는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준비된 천국은 먼저 청하였던 기존의 이스라엘에게 합당치 아니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 맹인들 즉 자기 몸으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들과 같은 그런 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들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비유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어서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11-13절)라고 더 말씀하고 있다. 11절의 말씀을 직역하면 ‘왕이 혼인 잔치의 예복이 입혀져 있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다’는 말이다. 12절의 말씀도 ‘어찌하여 예복이 되지 않고 들어왔느냐?’라는 말이다. 11-12절의 이 말씀은 천국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도 들어갈 수는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이 땅에 임한 천국은 오직 왕이 입혀주시는 예복이 되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결국 예복이란 왕이 베푸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그러므로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는 반드시 아들과 연관되어 있다. 즉 왕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이 입혀져야 한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진 상태의 나라이다. 여기에는 자기 의가 도무지 개입될 여지가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예복이 입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예복을 입을 수 있다고 우기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아니 모든 인간들은 자기 힘으로 예복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바로 죄인의 모습이다.


그것이 13절에서 드러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하였다. “그 손과 발”은 두 손과 두 발을 뜻하는 말로 두 손과 두 발이 멀쩡하게 있기 때문에 왕이 입혀주는 것을 거부하고 예복을 자기가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스스로 율법적인 행위가 가능하고 그 행위로 천국을 가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 두 손과 발을 묶어 천국에 들어오려고 하는 인간의 행위가 용납될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임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율법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해 차단하며 그에 따른 철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맺으셨다. 이 말씀은 청함(헬, 클레토스)과 택함(헬, 에클렉토스)이 헬라어에서는 같은 뜻의 단어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수 없이 많지만 부르심이 된 자는 (거의) 없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부르심이 된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눅 23:35)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택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그분과 연합되어 하나될 수 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교회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만 사는 자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20171105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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