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비유 강론 34
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말미암은 종말에 대한 강론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이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를 연달아 말씀하심으로 깨어 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임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나타내셨다. 열처녀 비유를 통해 준비하고 깨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기름을 사서 신랑이 언제 오든지 관계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신의 율법적인 노력과 힘을 값으로 치루어 사는 것으로 착각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혜 있는 다섯 처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것들을 값없이 산 자들이었다. 그것은 곧 언약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마음에 새기는 것이고 악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을 사서 준비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피로 사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 그 은혜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때에 깨어 있는 상태이고 천국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다.
이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달란트 비유인데 누가복음 19:12-27에 기록된 므나 비유와 아주 흡사한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어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비유의 결론이나 그 핵심적인 의미가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유의 시작을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스페르’라는 말인데 ‘꼭 같다’라는 표현이다. 즉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고 똑같은 의미의 비유라는 뜻이다. 앞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 대한 비유나 열 처녀 비유가 천국 비유이듯이 이 달란트 비유 또한 똑 같은 천국 비유이며 앞의 두 비유가 “깨어 있으라”라는 교훈을 주는 것과 같은 교훈의 비유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자기 소유”란 24:47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지혜 있는 종에게 맡긴 것과 같은 것으로 하늘의 것을 이 땅에 드러내도록 주신 것을 의미한다. 즉 주인은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나타내도록 넘겨 주셨다는 뜻이다.
비유의 내용인즉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15-18절)라고 하였다. 재능대로라고 했기 때문에 달란트는 영어로 탤런트(talent)를 의미하고 그것이 곧 맡겨진 재능, 배역이라고 많이들 오해한다. 그래서 은사를 자기 재능대로 잘 활용을 하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이 비유를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만약 우리가 이 본문을 그렇게 본다면 비유의 결론에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는 간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는 뜻인데 은사를 자기 재능대로 잘 활용하지 않거나 은사로 이익을 남기지 못하면 지옥간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해석은 성경 전체적인 맥락과 상충되는 해석이 된다.
달란트는 본래 무게 단위로 약 30kg 정도라고 하는데 신약 시대에서는 질량과 화폐의 단위로 쓰였다. 한 달란트가 6,000 데나리온인데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면 6,000일, 약 20년 정도 모아야 가능한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들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런 점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 비해서 적다고 할 수는 있지만 한 달란트라고 해서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기에 적은 금액을 받은 불만 때문에 땅에 묻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좀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자. 그 당시 종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 종이 주인에게 받은 돈은 적은 금액이 아닌데 만약 장사를 하다가 남겼으니 다행이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기지 못하고 손해를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 돈으로 손해를 입었다면 속앓이 하며 며칠 홧병으로 드러누웠다가 일어나면 될 일이지만 주인의 돈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주인에게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자면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한 것이 잘한 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자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말은 ‘각각 그 능력대로’ 주었다는 말이다. 즉 주인은 종들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주인은 그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원어 성경에 ‘금’이라는 표현이 없는데 번역 과정에서 삽입되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주인이 무엇을 하라고 한 언급이 없지만 종들 또한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기에 그것으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겼다. “장사하여”라는 말은 ‘효과를 나타내다’라는 뜻으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그 능력대로 효과를 나타내었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 받은 그 능력대로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19절)라고 하였는데 사실 이런 표현 때문에 인터넷에 많은 설교들이 ‘인생의 결산’이라는 제목으로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결산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시고 벌을 주시든지 상을 주시든지 하는 교훈의 비유가 아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0절) 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2절)라고 하였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한 이 말을 직역하자면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것을 얻었나이다’라는 말이다. 주인은 종들이 어떤 자인가를 잘 알았기에 그들의 능력대로 돈을 맡긴 것이며 또한 종들은 주인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바로 나가서 장사를 하여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것을 남겼다는 것이다. 즉 이 종들에게는 아무 것도 자기 자신의 것이 없었고 오직 주인의 것만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나 주인의 평가는 동일하였다. 우리 성경에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똑 같이 번역되었다. 21절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절)라고 하였고 또한 23절에서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3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4-25절).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는 ‘스클레로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거친’, ‘마른’, ‘사나운’, ‘매정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른성경에서는 “엄한 분”, 공동번역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하였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돈이 주인의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을 거칠고 사나운 분으로 오해하였다. 그래서 두려워하여 돈을 땅에 감추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즉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은 것에서 거두는 자, 한 마디로 손 하나 대지 않고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매정하고 사나운 주인으로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주인을 위해 무엇을 남기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26-30절).
주인에 대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오해하는 자들이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다. 남겼느냐 안 남겼느냐, 주인에게 얼마만큼 많이 이익이 되게 하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주인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종들은 주인이 없을지라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무엇을 의도하며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분인가를 알았기에 주인의 뜻대로 장사를 하였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멀리 타국으로 갔다는 생각으로 주인이 없는 것처럼 산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 없이 오히려 주인이 항상 함께 거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자가 얻는 것은 주인의 즐거움에 계속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받은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는 복이다. 이 비유역시 천국 비유라면 여기서 주인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종들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 땅에 임한 천국에는 주인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아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자는 십자가로 생명을 나타내신 그 길을 계속 가는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자에게는 더 넉넉하게 깨닫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된다.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1-13)
우리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 역할 또는 사명을 잘 감당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탤런트라는 맡겨진 재능, 은사를 가지고 많은 결과물들을 얻어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남긴 것으로 천국을 누리는 근거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 우리가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열매들을 우리 손에 붙여 주신 것일 뿐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 행하였다.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다. 주인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이루신 피의 은혜만이 주인이 주인답게 드러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주인을 알게 된 자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하는 종으로 사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때에 깨어 있는 것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이다(20180422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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