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비유 강론 26
마태복음 18:21-35
종들과 결산하는 왕의 비유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은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작은 자로 불러 천국에서 큰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목자는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다. 여기 길 잃은 양이 곧 죄를 범한 형제이고 그가 바로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우리 자신이다. 이러한 죄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한 몸으로서 교회라고 말씀하시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대하시며 계속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러자 베드로의 물음과 예수님의 답변이 이어진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1-22절). 베드로의 물음을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고 그런 형제를 용서하는 이런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합니까?”라는 말이다. 당시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세 번까지 용서할 것을 권하였기에 베드로는 이 물음을 통해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서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관대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490번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본문은 ‘일흔 일곱 번’ 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용서의 회수가 77회인지 490회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7과 70이라는 수는 완전수인데 특히 70은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에서 볼 수 있듯이(렘 29:10, 대하 36:21) 완전한 속죄의 기간을 상징하고 있는 수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질적인 뜻은 완전하게 용서하되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그 핵심적인 의미를 요약하는 표현으로 누가복음 17:3-4에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를 범한 후에 잘못을 구하면 용서하되 이런 일이 하루에 일곱 번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완전하게 무한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가? 인간은 다 죄인이기에 결코 이것을 이루어 낼 수 없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헛된 명령에 불과하든지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먼저 너희들이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묻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이 완전하고 무한한 용서를 할 수 없다면 자신의 죄인됨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용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피에미’(aphiemi)인데 ‘멀리 떨어져서’ 또는 ‘~로부터 멀리’라는 말의 ‘아포’와 ‘보내다’라는 ‘헤이미’의 합성이다. 즉 아피에미라는 말은 멀리 떨어져서 보내는 것이 용서라는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죄의 자리,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죄의 자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이 바로 생명의 자리이고 의의 권세이다. 그러므로 죄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보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그렇게 실천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란 생명의 자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인간이 본래 있던 죄의 자리를 들추어내시고 그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에 보내어진 근거를 철저히 십자가로 설명하고 확인시키신다. 이런 차원에서 천국 비유를 한 가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22-27절).
그러면 도대체 일만 달란트 빚이란 얼마나 되는가? 달란트란 무게의 단위였는데 신약에서는 질량과 화폐의 단위로 쓰이고 있다.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인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참고 마 20:2)이라고 보면 한 달란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16년간 모은 품삯이라고 생각하면 일만 달란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이다(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B.C.4년경의 유대, 이두매, 사마리아의 1년 세금이 약 600달란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만’(뮈리오이)이란 단어는 ‘무수히 많은’,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빚진 것과 죄지은 것이 같은 단어로 사용된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마치 빚을 진 사람의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갚는다”라는 말이다(25,26,28,29,30절). 왕은 결산하며 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죄에 대한 값을 반드시 치루라고 하였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25절). 왕은 율법에 근거하여 빚을 철저히 갚을 것을 명령한다. 출애굽기 22:3에 보면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출 22:3)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말하기를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절)라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액수의 빚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도무지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 달란트 빚진 종은 갚겠다고 하였지만 왕은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왕은 애초부터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을 비롯한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빚을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율법에 근거해서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갚으라고 한 것은 진짜 그렇게 갚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도 결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빚진 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갚겠다고 만용을 부린다.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해결하고 선하고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고 곧 우리의 죄성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율법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구원 받은 이후에는 믿음의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곧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구원 받은 삶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증명해 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이다.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그러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용서를 받았어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자기에게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를 옥에 가두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탕감을 받았어도 그것이 이유와 조건이 없는 용서인줄 모르기 때문이다. 일만 달란트에 비해 백 데나리온 빚졌다고 하는 것은 60만분의 1에 불과하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탕감(용서)받은 것이 은혜인 것을 모르기에 아직도 율법을 지켜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갚을 때까지 감옥에 보냈다.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1-35절).
왕은 은혜를 모르는 자를 불러 “악한 종”(32절)이라고 하였다. 왕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용서(탕감)를 모르는 자는 악한 자이다. 비유의 결론으로 왕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3절)라고 하였고 또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본 비유의 시작이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이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3절)라고 하여 본 비유가 천국 비유임을 나타내셨고 천국은 왕이 자기 백성들을 전적으로 불쌍히 여기심에 의해 용서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은 자, 낮은 자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의 결과이다. 그 십자가에 의해 불쌍히 여기심으로 완전하고 무한한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라는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용서를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누리고 있다면 또한 범죄한 형제에게 용서를 함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형제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 주신 긍휼과 용서의 결과를 날마다 확인하는 자가 성도이다. 물론 여기서 형제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또 다른 사람을 형제라고 말씀하는 것이며 이웃이란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20170702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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