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신명기

03.신명기 3:1-29 요단 동편 땅 정복과 분배

불편한 진리 2015. 4. 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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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1-29

요단 동편 땅 정복과 분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 40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상황에 있다. 2:14,15에서 말씀하듯이 이스라엘은 불신의 세력으로 상징되는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다 죽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생성된 백성으로 상징된 광야에서 난 새로운 세대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아 사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수로 삼는 자들과 싸워야 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혜택을 누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똑같은 심정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언약 백성이란 바로 이러한 자들이다. 즉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고 평화하라고 하는 자들과는 평화해야 하는 순종이 있는 자들이다.

본 장에서도 2장에서 헤스본 왕 시혼을 정복하였듯이 바산 왕 옥을 정복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그와 그 모든 백성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2)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3)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바산 왕 옥을 점령하면 되는 것이었다.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사람 대 사람이 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산 왕 옥의 침대를 소개하고 있는데 장이 아홉 규빗(4m 5), 광이 네 규빗(1m 80)이라고 했다.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탐지하였을 때에 그 땅의 사람들을 장대한 자로 말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장대한 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붙이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손에 붙이신 결과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벌이는 전쟁이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대로 동원된 것뿐이다. 그들은 그 전쟁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긍휼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재앙만 떨어질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은 이 세상에 무가치한 인종을 멸하고 살려둘 가치 있는 인종만 남기자는 조치이다. 그러면 무가치한 인종과 가치 있는 인종이란 어떤 존재를 말하는가? 여기서 가치 있고 없고 하는 문제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학벌이 좋은가? 혹은 경제력을 지녔는가? 아니면 권력이라도 있어서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가치한 인종과 가치 있는 인종의 차이는 붙이는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점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붙여주는 것만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가치 있는 인종이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족속은 이 지상에서 멸종되어 사라지는 인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결혼을 앞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선을 보게 되면 키가 작느니 인물이 못생겼다느니 하면서 외모로 모든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잠깐 만나서 사람 됨됨이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됨됨이를 보고 결혼하라는 말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절 이하에서는 요단 이 편의 땅, 즉 가나안 땅을 건너기 전의 땅을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한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렇게 먼저 기업을 주신 것은 약속의 땅에 건너가지 말고 요단 이 편 땅에서 편안하게 잘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21-22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기업이 가나안 땅인데 그 땅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신다는 보증으로 요단 이 편의 땅에 있는 족속들과 싸워 이기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을 구경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이는 출애굽 처음부터 누누이 제시되고 있었다. 출애굽기 14:13,14에 의하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홍해 앞에서 모세가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이 원리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고 여기 모압 평지까지 왔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여기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며 계속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는 것은 모세의 욕심이었다.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에게 일을 맡기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셨고 또한 모세에게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로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계시하신 것이었다. 때문에 모세는 모세에게 주어진 역할대로 일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백성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희생물이 되는 역할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했을 때 축복과 저주 양편을 다 이야기하셨다. 모세는 그 약속 중에 실패의 경우를 담당했고, 성공의 경우는 여호수아가 맡아서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또한 여호수아를 따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28).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담대케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담대하라는 말은 겁 없이 달려들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승리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을 발휘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모습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모습이란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이루신 십자가를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내 것을 내어 놓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을 일체 받지 않으신다. 그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십자가이다. 악마가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것이 개입되지 않은 것뿐이다. 이미 악마는 인간을 이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것이 제거된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한 분만 계셔도 좋은 나라라면 교회는 그 모습 그대로 만족할 줄 아는 모임이어야 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9.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