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신명기

01.신명기 1:1-46 하나님의 구원역사 회고

불편한 진리 2015. 3. 1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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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1-46

하나님의 구원역사 회고

 

지난 주일에 민수기 공부가 끝나고 계속 이어서 신명기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성경을 이렇게 계속 연결해서 공부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 요한계시록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지루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까지 배워보지 못하고 주님 앞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혹시 성경의 다른 부분이 긍금하다고 해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궁금증이 생기고 긍금증을 먼저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이 죄악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이든지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확인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거기서 주님의 피가 흘려졌다는 사실이 왜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날마다 확인해야 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대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서론을 말씀드리는가 하면 오늘부터 살펴볼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반복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연한 반복은 아니지만 앞에서 주신 율법을 다시 선포하신다는 차원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신명기는 1장에서 먼저 이스라엘이 어떠한 때에 어느 자리에 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 신명기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언덕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1:3은 이 시기를 출애굽 한 지 제 사십 년으로 언급한다. 그러면서 2절에서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열 하룻길을 애굽에서부터 40년이 걸려서 모압 동편 땅까지 와야 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간과 장소는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14:33)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1,5절의 요단 저편이라는 문구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신명기는 분명히 요단 이편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하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를 요단 저편 모압 땅이라고 장소적인 상황을 약속의 땅 안으로 끌어다 놓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적으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주신 말씀이지만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있는 관점에서 신명기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있는 위치(1-5)와 하나님의 약속(6-8)을 설명한 이후 곧장 재판장을 임명한 것(9-18)과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19-46)을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재판장을 임명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어떤 자가 지도자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13절에 보면,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라고 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로 골라 세운다고 했는데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란 어떤 자인가? 16,17절에서 답변을 이렇게 주고 있다. “내가 그 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이것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즉 재판장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반역을 다시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시키시는 차원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이스라엘이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행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일삼는 죄인이라는 뜻으로 신명기 1장에서부터 공박하면서 율법을 다시 선포하시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하나님께서 다시 율법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으면 그냥 들어가게 하시면 되지 하나님께서 또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다. 다시 폭넓게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가를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을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았다면 말씀을 다시 선포할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무조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교회라고 간판 걸린 교회(주성교회도 마찬가지로)를 교회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따로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성도로 보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신명기를 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나안 땅 앞에서 다시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이미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자로서 광야 생활을 했는데 과연 그 말씀에 맞게 살았는가를 고발하기 위해서 다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악한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다. 때문에 40111일이라고 말씀을 다시 선포하는 시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율법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잊어버렸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또 가나안 땅에서 실천해야 할 행동지침을 내려주시기 위해서도 아니다. 말씀을 통해서 과거를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을 받은 자로서 그 삶이 어떠했는가를 다시금 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악한 자이고 말씀에 실패한 자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신명기이다.

29-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또 하나님이 안아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갓난아이로 보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4:22에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들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대로 믿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만 하며 반역을 밥먹듯이 일삼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밖에 없고 그분이 친히 약속을 성취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가? 이렇게 새롭게 믿어진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어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어제의 믿음을 믿음으로 그대로 고수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제의 교회가 교회 아니고 오늘 성령께서 말씀으로 새롭게 모으시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교회이다.

그러기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고 또한 그런 자들에게 신명기가 주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결국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다고 할지라도 지루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송이꿀보다 달게 느껴지게 되기 때문에(19:10)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게 된다. 그런 자가 복 있는 자이다(1:1-2)(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