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신명기

02.신명기 2:1-37 평화할 자와 전쟁할 자

불편한 진리 2015. 3. 2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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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1-37 

평화할 자와 전쟁할 자

 

본 장에서 하나님은 에돔과 평화할 것(1-8), 모압과 평화할 것(9-15), 암몬과 평화할 것(16-23)을 말씀하신 반면 아모리 사람 시혼과는 전쟁할 것(24-37)으로 말씀하신 내용으로 구분된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4,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19).

그러나 시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으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비로소 시혼과 그 땅을 네게 붙이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 땅을 얻어서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30-31). 여기서 헤스본 왕 시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을 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시혼 왕이 더욱 나쁜 마음을 먹도록 하나님께서 조장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본성대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뜻이다. 죄악의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7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싸우고 다툼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사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 양식을 구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항상 풍족함으로 채우셨지만 이스라엘은 늘 불만족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풍족이란 무엇인가 많아서 풍족이 아니라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풍족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도 풍족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그래서 남보다 늘 뒤쳐진다고 생각하고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늘 부족하고, 자녀들에게 제대로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밤이 늦도록 벌어서 물질로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피해를 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인간들에 의해 죽은 분이시다. 그분만큼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 있는가? 내가 당하는 피해가 예수님보다 더 큰가?

24절에 의하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주고자 하신 땅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땅을 네 손에 붙였다고 하신다. 붙였다는 것은 이미 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싸우라고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는 독특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의 싸움은 힘겨루기이다. 힘을 겨루어서 그 결과에 따라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것이지 미리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어 놓고 싸우라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싸움의 결과로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자기 힘으로 싸워 놓고도 그것을 자기들의 승리로 보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 임의로 결정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수로 삼으신 자를 원수로 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에 그 말씀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져 있는 이스라엘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동하여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내 힘으로 싸우고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주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수긍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노력이 들어갔는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천국은 바로 이런 성도가 들어간다. 천국은 어린 양의 희생만 자랑하지 자기 힘을 자랑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34절에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라고 한다. 하나님이 진멸해 버리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할 가치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시혼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나 시혼이나 동일한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스라엘은 시혼을 진멸하면서 깨달아야 했다. 우리가 바로 시혼과 같이 진멸당해야 하는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려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왜 저 사람은 택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한껏 뽐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도란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지거나 자신의 넓은 마음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존재로 버려두신 자들을 보면서 자신이 죄악 가운데 그들과 똑같이 버려져 있는 존재임을 늘 깨닫고 아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에 또 굴복하고 엎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은 나그네 인생임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앞서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이스라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 세상 것으로 내 자리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착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불만족이 생기며 싸움과 다툼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나그네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라고 우리로 하여금 교회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것이 다 없어도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가 없고 더 많이 가졌고 더 적게 가졌다는 비교가 있을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아니 혹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좌절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시 자신을 십자가의 주님께로 되돌려 놓는 자들이 모여지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