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신명기

04.신명기 4:1-49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

불편한 진리 2015. 5. 1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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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4:1-49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

 

1절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가나안 땅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또한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고 하는 것도 조목조목 형식적로나마 의식을 잘 지키면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잘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 역사를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의미와 산다는 의미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5장에 가면 모세가 다시 십계명을 선포하는 것을 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의미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조건 십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오늘날도 십계명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과 대비해서 죽음이란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죽음이라는 것과는 대비되는 생명이란 본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한다는 것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말씀하심이 분명하다. 결국 본래 인간 모습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것을 누리는 상태가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과 연관된 규례와 법도는 죽음에 처한 인간의 모습과 반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이나 그 외 다른 말씀들을 잘 지키면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정도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현실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에만 순종해야 할 인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욕망에 순종할 때 인간은 자기의 위대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인간은 늘 선악에 대한 자기 기준을 가지고 끊임없이 판단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되면 선이고 자기에게 유익이 안 된다면 악이라고 생각한다.

목사가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날로 커질 때 그것을 목회 성공이라고 떠들며 자랑하게 된다. 그것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술과 재주를 과시하게 된다. 교인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기업이 다른 기업보다 커지기를 소원하며 직장을 다니듯이 자기들이 돈 내면서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커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다니는 보람으로 삼는다. 이렇게 큰 것을 좋아하고 높아지고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 이런 심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제자들의 자리 다툼하는 것을 보신 주님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다(20:20이하). 그래서 하신 말씀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8:4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다. 천국에 큰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는 큰 자만 있지 작은 자는 없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의 모습으로 작은 자로 살아간 자에게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 것이다.

사실 지금 대부분의 교인들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의 실상을 보면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귀여움을 받겠다는 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말씀대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임에 빠지지 않고 목사가 말하는 법칙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으로 연결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 한 번이라도 빠지면 천국에 못들어 갈 것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에서 우리들의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것은 규례와 법도의 세부 사항을 조목조목 무조건 다 지키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에게서 요구하신 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행동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만 순종하는 본래의 인간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 잘하며 전도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며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며 봉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규칙을 완벽하게 지켜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려고 하는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먼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율법이 주어지니까 무조건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켜 당당해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그것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다. 결국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좋아하고 감사하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3절에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을 더 좋아하고 이방 여인과 간음함으로 모두 죽여버린 사건이다. 즉 표면적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에 어긋나서 죽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 여인과 간음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죽음에 처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살지 못하고 인간이 따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살았을 때 주어진 결과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명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좋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 안에 있는 삶이고 또한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이다.

6절에 보면,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지켜 행하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를 철저히 의식으로 실천할 것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신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 믿음이 곧 지혜요 지식이다.

그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을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당부하신 하나님은 그 이유를 소멸하는 불로 자신을 소개하셨다(23,24). 왜 세상은 가차없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처음 세상을 만들 때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말씀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은 말씀 그 자체이다. 바로 에덴 동산의 상태가 그런 상태였으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에덴에는 불이 놓여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무서운 곳이다. 아무도 접근될 수 없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불이 놓여있다. 불은 생명 나무 가까이 인간들이 침범하는 것을 막아준다. 하나님이 무서운 곳에 계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 자신의 영생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생을 지키기 위함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즉 자기 백성들을 자신의 말씀 안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알지 못하는 것은 율법보다 성령께서 일하심이 훨씬 더 강력하고, 법도와 규례보다 더 엄중한 규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율법에 매여서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그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민수기 35장에서 이미 도피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이쯤에서 도피성에 대해서 다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땅과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시혼과 옥이 힘으로 통치하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심으로 이제는 세상의 힘의 방식으로 다스려지는 땅이 아니라 혹시 잘못하여 살인한 자라 할지라도 제사장의 지배하에서 은혜로 사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제사장의 지배하에 산다는 것은 제사장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제사를 통한 희생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결국 하나님의 희생에 의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 살아가는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이다. 곧 이러한 자가 규례와 법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9.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