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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저주

불편한 진리 2015. 3. 16. 16:48

복과 저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복을 예로부터 좋아하다보니 우리는 복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 베개, 숟가락 등에 ’()자를 새겨 넣었다. 이처럼 복을 좋아하고 복 받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과 혼동하게 되었다.

복과 반대적 의미의 말이라면 저주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저주라는 말만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 신명기 28장의 복과 저주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가 혹시 저주하면 마치 그 저주가 그대로 자신에게 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 또는 복의 계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이 일로 인해 시므이에게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므이를 죽이려고 흥분하는 아비새를 말렸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저주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0,11).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것을 기대하였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 이는 다윗의 만용이나 객기가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다. 즉 다윗은 언약의 씨(후손)를 이어가도록 선택받은 자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있는 내용이다. 창세기 12: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 약속이 지금 다윗에게 담겨져 있다(삼하 7).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언약의 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에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야곱이 하란까지 가서 고생해서 얻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채워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언약의 복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후손에 대한 약속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3:16). 후손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언약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3-4)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선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그것이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라고 선포하시고 팔복을 말씀하시며 그 복이 곧 천국임을 밝히셨다(5:3-10). 시편 속에서도 이미 복을 영생이라고 언급하였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133:3).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복이란 언약 안에 거하게 된 것이고 그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이 곧 천국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복이 그러하다면 저주에 대한 이해도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저주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핍박을 하고 나쁘게 만든다는 표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지(선택받지) 않은 상태를 말씀한다. 곧 죄 아래 버려져 있는 상태가 저주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신 분이다(22:20).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또 다른 언약을 새롭게 세우셨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던 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새 언약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품고 있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복을 누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이고 천국이며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깨달은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었다. 이미 언약의 복을 허락하셨기에 시므이의 저주가 결코 저주로 돌려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그 언약 때문에 구원의 복을 누리는 자이다. 이런 자에게는 사람이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 아래에서 죄의 권세에 매여 사는 세상의 삶이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덮어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복을 비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상대에게 평안을 빌라 만일 그 사람에게 빌었던 평안이 합당치 않다면 오히려 그 평안을 빌었던 자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10:12-13). 오늘 우리는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비난의 말, 저주에 대해 신경쓰지 말자. 오히려 저주한다면 그 저주를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 그것이 복으로 바뀌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저주가 우리에게 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저주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저주가 오히려 복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과 저주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누구신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언약의 성취자로서 언약의 복 그 자체이시다.

최근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책이 출판되는 것을 계기로 복과 저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샤마니즘적인 관점을 가지고 성경에 대입하여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죄의 권세에 매여 저주 아래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이제 성도는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비는 복이나 혹은 비난, 저주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5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