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칼럼 & 주제글

예수님의 승천이 주는 의미

불편한 진리 2015. 3. 12. 14:44

예수님의 승천이 주는 의미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삼는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고백이 있다.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은 이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생령이란 말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때의 생령은 사람이 무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죄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고 아담의 형상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5:1-3). 사람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사람은 이제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죄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은 동시에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를 극복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외부, 즉 하나님 편에서 가능케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즉 이 땅의 존재가 아닌 하늘에서 메시아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한 사탄을 쳐부술 후손을 약속하신 것이었다(3:15).

시편 16편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8-10/개역한글판)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윗이 바라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육체가 되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메시아직의 원리가 깔려 있다. 즉 메시아란 죄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자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다는 것은 완전한 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와는 상관없이 오시는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란 그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는 분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40일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고(1:3),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1:4-5).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졌으니 이제 승천하는 것이고 그 승천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신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하나님 나라)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으니 너희들은 이제 거기에 더 보태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면 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는,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늘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고 완벽한 승리를 가지게 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승천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베드로가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종말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다. 이 종말의 때에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2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십자가를 지는 자가 예수님뿐이었는가? 십자가를 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메시아가 될 자는 죽음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구약에서 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변화를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예언이 성취된 것이며, 바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이고 또한 오른쪽이란 영광과 권능의 자리에 앉으셨음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할 때에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셨으므로 보좌에 앉으실 수 있었다.

내가(예수) 항상 내(예수) 앞에 계신 주(여호와)를 뵈웠음이여 나(예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여호와) (예수) 우편에 계시도다”(2:25). “요동치 않게라는 것은 확고한 자리 확보를 위하여 죽음과 음부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2:27-28). 여기서 라고 하는 사람이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이 될 수 없음은 다윗은 아직 음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2: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성취임이 명백하다. 이제 예수님은 구원사역의 완성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계속적으로 대언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8:4/참고 요일 2:1).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련의 사건들은 메시아 되심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사람이 되셨고, 죄인들을 대표하여(5:17-18) 죄악을 담당하시고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를 십자가에서 홀로 담당하심으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다(2:6-8). 이러한 저주를 받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고, 창세 전에 누리던 영광의 자리로 회복시키셨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임을 증거하신 것이다(1:15).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이란 주님의 자리로의 회복이다. 주님의 자리로의 등극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구원을 얻기 위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하였듯이 주님의 증인된 사역을 감당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무엇의 증거자여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증거한다고 해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승천이 있게 된 원인을 바로 증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부활과 승천의 최종적 영광을 위한 하나의 추억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1에서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과 성도와의 칸막이가 부활 사건이나 승천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 안에 부활과 승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스도 구원 사역의 중심은 십자가이다. 승천의 영광만 바라보고 우리가 그 하늘나라에 앉을 영광만 생각한다면 구원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구원이란 이 땅의 것을 날마다 더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하늘로 가신 그분이 이 땅과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셨다면 성도의 삶은 이 땅과 이 땅의 것을 날마다 버리면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을 위하여 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버리며 사는 자라야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자격이 있다. 버리면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밀어내고 버리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10:29-30).

세상 것을 버리면서 산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는 일로 기쁨을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기에 그분만 증거하는 삶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 역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묵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을 때에 의미가 있는 삶이다. 그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히는 자만이 진정한 주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다. 십자가에 죽어보지 않은 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증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