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민수기 25:1-18
바알브올에 속한 자
우리는 민수기를 공부해 나가면서 발람이 저주하고자 하는 사건이 왜 기록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저주받는 백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 무당에게 왜 이렇게 간섭하시며 철저히 막으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사건을 장황하게 기록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정도가 아니다. 모세가 민수기를 기록하여 1차적으로 읽는 자들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이 이 성경을 읽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내부에 대한 주장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언약 정신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여기 25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발람이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서 발락의 요구대로 그토록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면 그러면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어떠냐 하는 것이다. 1,2절에서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란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과 연관되어진 점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속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3절). 이렇게 이스라엘은 철저히 자기 욕심에 사로 잡혀서 어떤 신이든 좋다는 식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치셨다.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라고 알려주고 있다(9절).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두 가지 명령을 하셨다. 첫째는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해 목매어 달라는 것이고(4절), 두 번째는 사사들이 바알브올에 속한 자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었다(5절).
이러한 상황에서 6-8절에 보면 희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회막에 모여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온다. 그것을 본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의 막에 들어가서 그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찔러서 죽인다. 그리하여 염병이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중의 어떤 남자가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은 아마 자신의 여자라고 강조하고 자랑스럽게 공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하나님을 조소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해 전혀 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 같다.
우리는 이 본문을 가지고 쉽게 하나님은 음행과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니까 절대로 음행과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언약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단순한 음행이거나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따르기보다는 보이는 즐거움에 치우쳐 있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음행은 단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즉 죄악의 열매이다.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교회에서 음행과 우상숭배가 죄가 된다고 말하면 많은 교인들은 음행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타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행하지 않고 우상숭배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며 새 사람이 되어 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음행이나 우상숭배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더러 이렇게 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바로 이러한 존재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공박하는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본문을 대할 때에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라고 하는 교훈적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이유이다.
이스라엘이 곧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음행을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으니 우리는 음행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받아들인다면 과연 인간이 음행을 피할 수 있는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음행이라는 행동이 없다고 해서 자신은 음행의 문제에서만큼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성경은 이스라엘이 음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아브라함의 실수, 모세의 실패, 다윗의 범죄 등등을 기록해 놓은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은 참으로 지저분한 책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내가 성경을 볼 수 있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놀라야 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인해 타락한 죄인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인격을 가지고 자신을 미화하고 더러운 모습을 가리면서 성도인척 했던 우리의 죄된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해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엎드리도록 하는 이것이 말씀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도 보이는 것에 치우치고 마음에 가득한 자기 욕심을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음행을 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바알브올에게 속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으로 인해서 그치느냐 하는 것이다. 11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창으로 남녀를 찔러 죽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행동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시고 이스라엘을 속죄하신다. 이 일 때문에 4,5절에서 말씀하신 두 가지 명령도 아마 시행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비느하스가 한 행동이 착한 행동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 착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서로 융화하고 화합하도록 중재해서 음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착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13절에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비느하스의 행동이 이스라엘 전체를 속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떻게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그것이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질투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등장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없다.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이스라엘이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스라엘 속에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는 차원에서 음행을 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비느하스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동을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에 염병이 그치고 평화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12절)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여기 평화의 언약은 비느하스가 두 남녀를 죽임으로서 주어졌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평화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평화란 아무 일 없이 조용하게 그리고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다툼과 싸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싸움과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면 평화라는 말도 필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평화의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세상에 있었는데 그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된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언약 정신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할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평화라고 하는 것이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음행한 두 남녀를 죽이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이 소유해야할 정신이다(13절).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가 세상에 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질투심으로 행동하는 자가 등장하고 그 행동에 동조하는 사람에 한해서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사장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며 그에 따라 행동하시고 사신 분이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속죄가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가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곧 평화의 언약 안에 부름 받은 자이다.
대부분 교회에 불화가 없고 문제가 없이 외적으로 조용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으면 교회가 발전되고 있다고 하고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 땅에서 완전한 인간의 모임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마귀는 항상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의 모습 그대로 비쳐지지 않도록 활동하고 있다. 때문에 이 땅에서의 교회에는 항상 비언약적 세력(세상적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밀쳐내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목회란, 무조건 사랑으로 대접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비언약적 사고방식이 잘려 나가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1999.1.2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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