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
고린도전서 10:14-33
하나님께 영광
10장 전반부에서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성찬식과 같은 교회의 의식에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를 행하다가 멸망당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말함으로 바울 사도는 의식 자체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혔다. 아무리 의식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14절에서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도가 우상 숭배를 단호히 거부하여야 하는 이유를 20,21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바울 사도는 아마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마 6:24). 바울 사도는 우상 숭배하는 것을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고 또한 귀신의 상에 참여해서 함께 만찬을 나누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제하는 것은 같은 상에서 함께 식사는 나누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과 교제하고 상에 참여하여 함께 만찬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가?
16,17절에 보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한 자들이었다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예로 들고 있다(18절). 즉 교제하고 제단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을 말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매번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포도주 잔을 나누는 것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에 날마다 동참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성찬에 참여하게 되는 그것이 곧 주님의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죽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주님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바울 사도는 ‘한 몸’을 이룬다고 표현하였다(17절).
성도는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한 몸 됨을 확인하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우상 숭배나 조상 숭배에 대한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거나 그러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자는 술 담배를 하는 자보다 상대적으로 죄를 안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한 몸이 되었는가 하는 데 있다. 날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우리가 확인하여야 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더불어 사는 십자가의 삶이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서 그에게 이해되어지는 예수님은 다르다. 그렇다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소원하는 성도라면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우상 숭배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과 교제하는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게 되어 있다. 십자가의 주님께 나의 모든 마음이 가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에 마음이 가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를 절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마음이 가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함으로 성도는 늘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주님의 십자가에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23, 24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6:12에서 이미 바울 사도가 한 말이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에게는 우상 제물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기 자신을 위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신앙의 문제를 지식과 권리를 기준으로 하지 말고 진정으로 상대에게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느냐 하는 것이 성도가 생각해야 하는 진정한 자유이다. 우상 제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 문제로 죄냐 죄가 아니냐로 구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복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라는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는 성도는 분명히 우상 제물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가 항상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타인의 유익이다.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지 못하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그것이 이웃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상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아직도 약한 양심을 가지고 의심하는 자를 이해하고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배려 때문이고(25절), 둘째는 온전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의심하는 양심을 가진 약한 신자에 의해서 판단을 받지 않기 위해서다(29절). 바울 사도는 2:15에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아니한다고 말한바 있다.
의심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이고 육적인 기준과 표준을 가지고 신령한 사람을 판단하지만, 그가 신령한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신령한 자는 약한 자에게 판단 받을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남들에게 비방을 받는 것은 오히려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절).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식으로 말만하면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난 것을 두고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났다. 십자가의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함으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미 밝혀 놓았듯이 오직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제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33절)고 마무리 짓고 있다. 성도는 자유는 남을 생각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사람들에게 거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유와 유익을 추구하기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2001.6.10/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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