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1.고린도전서 10:1-13 이스라엘의 실패

불편한 진리 2015. 2. 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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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13 

이스라엘의 실패

 

바울 사도는 8장에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말했었다. 9장에 와서는 자신의 사도직을 말하면서 자유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사도직이나 자유함은 오직 복음을 위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우상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상대방에게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이웃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바울은 말한다. 자신의 사도직과 자유는 이웃에게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절제되고 때로는 포기되는 삶으로 살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했고 1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는 이후로는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반역한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언뜻 보면 9장의 말씀과 10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연관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바울 사도가 출애굽하는 사건을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고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왜 성례전적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의식이 아무리 거룩하고 중요하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인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한 번 하나님을 알게 되고 지식이 있게 되었으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영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육의 생활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같다. 그래서 자유라는 명목으로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 사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사건을 예로써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는 모세의 인도 아래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와 성찬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이 신약에 와서 비로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광야시대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이고, 신령한 식물을 먹은 자이며 신령한 음료를 마신 자였다. 즉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그들에 대하여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세례를 받았고 성찬에 참여한 자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멸망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에 참여되었다고 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나 의식 자체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예를 말하면서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성도는 악을 즐겨하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구약에서 멸망받은 자들은 악을 즐겼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셨느니라”(3:7-11)

히브리서 기록자는 몇 구절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8-19)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이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믿음을 순종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믿음이란 순종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성도를 장악하고 있다면 당연히 믿음을 좇아 사는 순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복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난 것이 죄악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이 즐겨했던 악을 대표적으로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우상숭배(7), 간음(8), 주를 시험하는 것(9), 원망(10).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사고방식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가지고 그들이 지옥갔느냐 천국에 갔느냐 하는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단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실패한 이야기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과연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는 모습으로 있지는 않는가를 점검하라는 뜻이다.

 

의식 자체가 마술적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사 의식이나 절기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넣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하는 것이 되지 성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명을 누리도록 자동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자!’, 혹은 십자가를 믿자!’ 라고 말하는 것은 로마시대 당시에 나무로 만든 사형 형틀을 보자든지 아니면 그것을 믿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십자가가 일자형이냐 십자형이냐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자형이면 어떻고 십자형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 형틀에서 저주를 담고 대속의 피를 흘리시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찬이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예배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모든 것들이 신앙에서 주어지는 시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2,13절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의지한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자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전도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에 의해 언젠가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하시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13절 말씀은 시험을 면제해 준다거나 내가 이길 수 있을 시험만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당할 시험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시험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 방식으로 그 시험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시험을 이기도록 피할 수 있는 길까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할 길이란 주님에 의해 능히 거쳐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피할 길이라면 하나님이 애초에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피할 길을 내가 형통하고 내게서 문제가 사라지고 내 입장에서 해결되는 쪽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피할 길에는 내가 더 고통 당하고, 내가 죽는 것일 수도 있다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닌 어떤 시험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내가 죽는 시험으로 주어진다. 십자가의 주님은 이 땅에 있는 자를 죽여서 하늘에서 살려서 살아난 자와 만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2001.6.3/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