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0.고린도전서 9:15-27 바울의 자유

불편한 진리 2015. 2. 2. 20:19

 

20/

고린도전서 9:15-27 

바울의 자유

 

14절에 보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9장에서 자신이 복음 전했던 교회를 통해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음을 말했었다. 그렇지만 그 권리를 자신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조차도 오직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주님께 누가 될까봐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울 사도의 관심은 물질적인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에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지 복음 전하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만으로 만족하고 복음이 살려주는 은혜를 따라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 사도는 자신이나 고린도 교회나 동일하게 철저히 복음 중심이어야 함을 나타내었다. 15절에서는 또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바울 사도의 선언은 차라리 복음으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곳까지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 사도의 자랑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1에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2:1 이하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즉 바울 사도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였다. 즉 복음 전하는 자신의 일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가 자랑거리라는 말이다.

 

바울은 전에 복음의 훼방자요 교회를 향한 핍박자였습니다. 그러한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십자가만 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라고 한다(딤전 1:12-16). 바울은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가장 미련하고 약한 사실들을 가지고도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를 쓰시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 아는 자들이 생기는 것, 그것을 은혜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16)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부득불이란 하기 싫은 데 화가 무서워서 억지로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종으로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라고 하는 것도 어떤 징벌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음 전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저주의 상태에 있는 모습이기에 그것이 바로 화가 임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대로 바울에게 있어서 상이란 바로 복음을 값없이 전하게 되는 삶 자체라는 것이다(18). 때문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의 은혜가 드러나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얼마든지 약해질 수 있고, 권리를 포기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랑은 복음이 되고 있는가? 인간은 본래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자랑함으로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된다. 거기에 삶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이 복음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을 아는 것 속에서만 복음이 자랑거리가 된다. 자신에게는 전혀 자랑거리가 없다는 것을 철저히 알게 될 때에 복음만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제 19-23절에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위치에 있음을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그리고 20-23절까지 여러 사람을 얻기 위해서 여러 모양이 된 것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8장에서 우상 제물 먹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자유만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 약한 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마음대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지만 그 자유를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자유는 이웃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하나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의 신앙 기준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기준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판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14:3)라고 한다. 성도는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겼고 또한 자기 백성들을 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고 희생하는 삶이 바로 성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신앙은 나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아는 모습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여러 모양이 되었던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살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다(21,22). 이 말은 바울 사도가 카멜레온같이 적절한 필요에 의해서 자신을 적응시키고 기회를 따라서 움직였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자체가 바로 죄인들과 동일시되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었기에 성도는 주님을 좇아가고 오직 복음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라는 뜻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23).

 

이제 24-27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절제와 자기를 쳐 복종시키며 살았던 삶에 대해서 말한다. 이 절제의 삶을 바울은 달음질하는 경주자와 운동을 하는 선수에다 비유하고 있다. 당시 헬라문화에서 운동경기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바울은 이 경기를 비유하면서 자신의 삶을 소개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복음에 참여하고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곧 경주를 하고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경주자나 격투를 하는 운동 경기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목적이 있다.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승리를 위해서는 자기의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참고 절제한다. 달음질하고, 권투를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만한 것은 모두 거부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승리를 위해서이다. 즉 면류관을 위해서인 것이다. 바울은 이 예를 들면서 선수들이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도 그토록 자기의 자유를 절제하며 우승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데 하물며 영원히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목적으로 사는 성도들이 절제없이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도,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는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고 달려가는 자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오해하였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대로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잘못된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성도가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자유가 하나님의 일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방향도 없이 달리는 경주자 같고, 허공을 치는 격투 선수와 같다는 것이다(26).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27)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열심과 자신의 생각, 자신의 방법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와 방법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자신을 늘 복종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들과 동일시되신 모습으로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의 구원 때문에 나를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구원 때문에 내가 부름을 입은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 정신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 속에 포기와 절제, 희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복음을 진실로 아는 자 아니 복음에 이끌려 사는 자의 모습이다. 성도에게는 영생이 방법이자 목표이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절제요 희생이다. 결국 바울 사도가 9장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삶을 모범으로 보고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이렇게 십자가의 희생정신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2001.5.27/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