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18.고린도전서 8:1-13 우상 제물

불편한 진리 2015. 2.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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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13 

우상 제물

 

바울 사도는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다. 당시에 고린도시에서는 우상 제물로 바쳐진 음식 모두가 고린도에 있는 시장에서 다 팔리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의 음식이 신전에 제물로 드려진 뒤에 시장에 파는 것들이었다. 설혹 우상 신전에 드려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시장에 내다 파는 음식물의 일부가 대표로 드려지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가 다 우상 신전에 드려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고린도에 여행하거나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부추겼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부추김을 받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일은 죄로 여겼을 것이다.

당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시장으로 흘러 나와 판매되고 있었다. 그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고, 또 그것이 고기일 경우 바른 방법으로 도살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먹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제물은 먹지 말라고 가르쳤을 것이고, 자연히 고린도 교회 안에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아 우상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우상 제물에 대하여 자유함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시장에 팔린 음식이 비록 우상 제물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자유함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자유함을 주장하는 지식은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지식은 4-6절까지의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우상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신은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그들의 지식은 참으로 바른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자유는 이런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하게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삶이다(5:1).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어느 쪽이 정당하냐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즉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옳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우상 제물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자유함이 옳다라고 하면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우상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대한 문제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것이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고, 8절에 보면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상 제물을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우상의 제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지식 자체는 결코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다. 사랑이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은 결단코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사랑은 덕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율법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이것이 죄가 되느냐 죄가 안 되느냐를 따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죄를 우리가 행하는 행동에 의해 발생되고 발생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란 율법적인 기준에 의해 우리의 행동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죄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의의 권세에 사로잡히는 것만이 죄와 상관없는 생명의 삶으로 전환되어질 수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죄에서 의로 전환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결코 사랑이란 나올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8절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음식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세움을 입고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나 아직도 우상을 실재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우상을 섬기려는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자거나 우상숭배의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약한 형제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여 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신전에 직접 함께 하여 먹고 마신 것으로 보인다(10). 이것을 본 자들이 성도의 자유함을 보고 오해하여 멸망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그 사람이 오해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복음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사람에게 짓는 죄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문제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란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교회란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아는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있는 것이 교회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신앙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여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은 결국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인데 곧 그것은 그 형제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고 안 먹고는 죄가 되는 일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 제물을 먹는 일로 형제에게 덕이 되지 않고 도리어 실족케 하면 영원히 고기를 먹는 자유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13).

 

결국 신앙이란 어떤 법을 지키는 것이나 어기는 것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을 초월하여 계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한 몸으로 지체가 된 형제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으로 규정지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자유란 십자가의 주님께 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상이라는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이 우상이다. 자신의 자유를 내세우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그것조차도 우리에게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32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해서 내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직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안다면 그분께 매여 있고 그분의 뜻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 바라보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좇아 자유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제, 이웃을 위해 내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것조차도 절제하고 희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진정한 자유가 주어진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형제를 위해 영원히 먹지 않는 희생을 하겠다는 바울의 모습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나의 취미, 나의 성격, 나의 원하는 목표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2001.5.13/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