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2.요한복음 13:1-20 예수님의 사랑

불편한 진리 2015. 1. 26. 17:24

32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3:1-20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를 믿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목표내지는 목적이 되고 있다는 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기독교의 실제적인 풍성함과 진리의 오묘함을 모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진리의 전부를 다 알게 된 상태에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세상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언제나 주님을 향해서 대적하는 자세로 서 있었던 인간인가를 알라는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관해서 주님의 큰 은혜를 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님의 은혜만 크게 보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자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죄인이라는 식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잘 알 수 있는가 하면 자기의 자존심이 건드려지거나 자기의 이름이 무시되면 거기에 대하여 반드시 반대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자라면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불만족에 살고 있습니다. 자신은 늘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채워줄 신으로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불만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주는 확실한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천국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천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한 불만족으로 인하여 언제나 우리는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면 사는 만큼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푼다고 하지만 정작 사랑을 베푼 유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언제든지 보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식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언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들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에게서 베푼 사랑만큼 자기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조건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란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결단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세계에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을 통해 보여 주려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6)라고 하면서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8)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한술 더 떠서 자기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미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에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본문의 핵심적인 의미가 매일매일의 회개에 대한 교훈인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8절을 보면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문제는 내 쪽에서의 회개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단순히 봉사나 겸손이나 섬김에 대한 이야기 이상의 뜻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우리는 흔히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대한 표현들을 보면서 동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의 은혜(은사)를 받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 결과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 13장입니다.

정작 사랑에 대하여 보려면 요한일서 4:9-10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그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통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니 제자들이 세상에서 생각하던 체계가 일시에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승과 상전의 자격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라도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되지 못한다는 고발입니다.

인간은 도무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을 섬기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희생이 전제되어 질 때에만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종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과 같은 차원에서 십자가로 죄인들을 섬기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주님을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깨끗해지고 주님과 관계있는 자로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의 덕택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줄 어떻게 압니까? 14절 이하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서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보여 주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의 실제적인 모습이 서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짜로 받은 것이 가까이 있는 이웃들에게로 그냥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들 앞에서 이기주의를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 예수님의 사랑 앞에 어쩔 수 없게 되었노라고 고백된 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굴복시켰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에만 관심 있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입니다. 천국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혹 예수님께서 천국이 없다고 말씀하실지라도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줄 아는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하게 하시는 일입니까?<199722/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