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세상의 심판
요한복음 12:37-50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좋아 합니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하려면 항상 다수결의 원칙을 고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제도 중에서 민주주의가 현재로서는 가장 낫다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도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를 결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가를 따집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도 다수가 원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합니다.
다수가 원하지 않으면 교회 운영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도 다수가 원하는 쪽으로 목회를 해야 교회가 안정되며 부흥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는 일에 늘 많은 시간과 힘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이 일에 한 평생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사람을 향해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향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을 이미 포기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런 진부한 물음에 대하여 답할 겨를이 없습니다.
온통 교회성장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 교회 교인 만들기에 분주합니다. 목회자는 자기편 만들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고, 복음을 널리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이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공공연히 “꿩 잡는 것이 매”라고 합니다. 교인수 많이 모아 부흥시키면 인정받는 목회자, 인정받는 교회로 생각합니다. 과연 여기에 주님이 동의하시겠습니까?
37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셨을 때에 사람들이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38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40절)는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 6:10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아닌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방해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을 한 마디로 “선택”이라고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자기 백성만 구원받도록 골라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란 어떤 아들이어야 합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아들이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란, 자기 백성을 골라내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자와 아닌 자로 양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많은 사람을 전도해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의도였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 안 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계셔서 계속 전도하셔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측면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절)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오직 “주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볼 것 같으면 모두 다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이라는 면에서 보니까 인간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수용할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할지라도 인간은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43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따로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47절). 못믿는 것 자체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기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요 3:18).
여기까지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대한 한 획을 긋는 결론 부분입니다. 13장부터는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모습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본문을 통해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설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전도하셨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반부는 인간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를 보여주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는 못 믿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까? 자기 열심에 빠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을 대항하고 주님을 향해서 원수 노릇하는 이런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것을 보여줄지라도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스스로는 못 믿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자기 정열을 다 태워서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자기 사랑만은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영광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일으켰을지라도 믿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나 인간은 똑같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적을 베푸신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사람이 모였든 적은 사람이 모였든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을 죽인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업은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해 세상에서 무엇이 의(義)고 무엇이 악(惡)인지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인정하고 고백된 자를 가지고 신자요, 성도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교인수 많아진 것을 부흥으로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목회자가 자기편이 많아지고 자기 제자로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많은 것이라야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숫자적인 부흥, 그것은 인간들의 기쁨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은 자기 아들의 영광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44-45절).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 비추어서 보십니다. 아들과 일치하지 않는 영광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일 뿐입니다. 다수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1997년 1월 19일/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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