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0.요한복음 12:12-36 한 알의 밀

불편한 진리 2015. 1. 24. 12:55

30

한 알의 밀

요한복음 12:12-36

 

로마서 1:19에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1:21)라고 말씀합니다. 흔히들 이 말씀이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해서 자연계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은 누구에게나 다 인간이라면 하나님, 즉 신()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과는 분명히 다른 하나님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가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에 대하여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이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끊임없이 일치시켜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천국, 구원 등 모든 것들을 날마다 성경에서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버려야하고 날마다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죄의 본성에 의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비록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일이 되면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변질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예수님을 죽였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야를 철저히 기다린 자들이었습니다. 누가 신기한 이적이라도 베풀면 메시야로 추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도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늘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라고 소리칩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왕으로서 그렇게 환영을 받으며 힘으로 로마 정부를 엎어놓는 능력을 가진 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구원이란, 지금의 압제 당하는 상황, 좋지 못한 형편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16).

이 때 요한복음에서는 헬라인(이방인)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방인이 등장되는 기록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원해서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라고 하십니다. 란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이방인들을 새로 부르셔서 그들로 하나님 백성 삼으시는 상징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때에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는 때가 되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자주 잘 인용합니다. 그런데 언제 잘 인용하느냐 하면, 대개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할 때나 혹은 기껏해야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할 때에 우리는 이 말씀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풍성해지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그렇게 기대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세상의 방식으로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또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32)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어떤 죽음을 죽을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라고 했습니다(33). “한 알의 밀그것은 죽어야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 생명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생명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30). 그러기에 그들을 위해 한 알의 밀처럼 죽어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지 않으면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도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는 메시야로 나타내시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그대로 믿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신 메시야상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에 따라 순종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지 죽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도 없고 생각해 본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한 메시야에 대한 개념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에 유대인들은 입술로만 찬사를 보내었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귀를 타셨지만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로 불러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죽어야 하는 메시야임을 발견하였을 때 그들은 가차 없이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아니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태어나면서 이단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관계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일 뿐입니다.

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해서 그들이 다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안되는 예수라면 십자가에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가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에 큰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좋은 교회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많이 모인다고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이라고 인정받는 것이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국 다 주님을 버렸습니다.

많은 무리들 속에 자신을 편승시켜 놓고 천국은 받아놓은 것이라고 자위하지 말고 이제까지 내가 알았던 예수를 버리고 지금 말씀을 통해 믿게 된 주님, 그 주님 앞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의뢰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1997112/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