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한 사람의 죽음
요한복음 11:45-57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를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기다렸다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병든 자를 고치는 것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더 큰 이적이기 때문에 더 큰 이적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엄청난 것임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11:4에서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결말을 보면, 오늘 본문 45-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 때문에 믿는 자들이 생겼는가 하면 도리어 믿지 아니하고 그 일을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고발함으로 공회가 모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회는 예수님을 어떻게 모실까 내지는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의도로 모인 모임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는 일에 대하여 방해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 때문에 양분되고 있었습니다. 믿는 자와 그 믿는 것을 방해하려는 자들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는 말에 대하여 단순히 우리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오히려 반대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나는 믿는 자!”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최면에 걸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자라는 증거를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옹호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늘 자부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평가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옹호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항하고 거부하는 자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48절). 그들의 염려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진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로마 정부가 보기에는 로마에 대한 항거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로마가 유대인들의 땅을 빼앗아 갈 것이며, 민족을 말살할 것이라는 염려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사렛이라는 시골에서 목수일에 전념했다면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유대민족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회에서 하고 있는 논의의 초점은 우리의 땅을 어떻게 계속 지켜갈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면 공동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50절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가야바는 자기 권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고 로마로부터 유대라고 하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권력, 내 명예를 조금이라도 유지시켜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 교회에 대한 충성, 전도, 예배 이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이 기도요, 전도요, 또한 예배이고, 봉사입니다. 혹시 내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늘 염려하며 주를 섬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되어 보자는 데 집중되어 있지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는 것도 상관없다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야바의 말을 이용해서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유대민족을 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53절에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결국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을 통해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본격적으로 그들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삼습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들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4절). 하늘에서 오는 영광이란 오직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란 하늘의 영광을 독차지 하는 욕심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던져버린 영광입니다. 비천한 영광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 본래의 영광을 버리고 고난 받고 죄인들로부터 학대받는 모습의 영광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생자의 영광이란, 대속의 죽음으로 오는 영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 그 자체가 하나님께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7-19).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정신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정신은 다른 사람을 밟아서 올라서야 하고,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자기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심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같이 살려고 복음만 외치는 자는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입을 다물어 주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도 우리가 다 같이 편하게 교회를 크게 이루고 잘 살 수 있을텐데 하는 것이 교회 자체에 관심 가진 자들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조직이나 혹은 예배당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임이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복음을 외치는 자들을 밀어내고 제거하려는 모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기에 십자가의 은혜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까? 후자의 교회라면 자기를 희생시켜서라도 예수님만 높이는 교회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1996년 12월 29일/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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