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
누가복음 16:1-13
불의한 청지기 비유
본문에 등장하는 비유는 보통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불린다. 이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이유가 8절에서 이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지기가 한편으로는 불의한 청지기로 불리워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가?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비유의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9절)고 말씀하시면서 마치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모습으로 살면 영생을 얻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과연 불의한 청지기가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비유를 통해 어떤 교리를 추출해 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또한 비유의 내용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윤리성과 도덕성을 논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 비유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44절에 나오면 비유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어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한다면 오늘날 입장에서 보자면 그 사람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여기서도 그 사람의 됨됨이, 윤리 도덕성을 따지고자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이 보화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듯이 성도는 세상과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면서도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모습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아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이 비유에서도 우리는 윤리적인 접근을 할 수 없고 또한 윤리 도덕성의 잣대를 가지고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을 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의 내용 자체에 세세하게 관심 가지기보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1절에 의하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다고 했다.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해고하겠다는 것이다. 청지기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4절)는 계산을 가지고 사람들의 빚을 낮추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결코 자신을 해고시킨 주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렇게 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이 앞으로 처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자 한 것뿐이었다.
주인은 이렇게 일을 처리한 청지기에 대하여 칭찬하였다고 되어 있다. 처음에는 주인이 자신의 재물을 허비한다는 것을 알고 청지기를 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지기는 해고당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그 일이 옳은가 옳지 않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8절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주인이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왜 이 청지기를 칭찬하였는가? 이 문제를 우리가 심도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아는 것이 본 비유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충성된 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해고당할 위기가 왔을 때에 채무자를 불러 빚을 감면해 준 것을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행동이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근거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주인이 그를 칭찬한 것은 그의 행동이 민첩하고 슬기로웠기 때문이다. 8절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 준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처럼 본문 자체는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칭찬을 청지기의 신실성이나 충성에 돌리지 않고 청지기의 민첩하고 지혜로운 행동에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해서 마치 주인이 청지기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시인하였거나 칭찬한 것처럼 생각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청지기의 행동에서 어떤 점이 주인이 보기에 지혜롭게 여겨졌고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청지기가 주인의 부채를 임의로 감면해 준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청지기의 행동은 자신에게 예기치 않게 닥쳐온 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타결하기 위한 기발한 착상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불성실한 행위로 볼 대 주인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축출을 당하거나 아니면 감옥에 투옥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주인으로부터 단지 해고 통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것을 볼 때 주인은 청지기에 대하여 관대하게 대하였다는 것이다. 청지기는 이러한 주인의 관대함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자신을 위한 결정적인 기회로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청지기의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동네 사람들은 주인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채는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주인이 청지기를 못마땅하게 여겨 모든 일들을 취소하고 원점으로 돌려놓는다면 주인은 청지기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판이 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은 자신을 채무자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되게끔 한 청지기의 기발하고 지혜로운 행동에 대하여 칭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비유의 초점은 8절 하반절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것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세상에서 사는 악한 자라도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위기에 대처할 줄 아는 모습이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빛의 아들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는 의미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한 자라도 자신의 종말을 알아서 비록 주인의 것이지만 그 빚을 감면해 주어서 자신의 앞길을 대처해 나가는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더더욱 지혜로운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서는 악한 자의 지혜가 더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서 결코 무관심한 분이 아니시다. 청지기가 지혜롭게 처신한 것과 같이 앞길을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종말론적 위기에 누가 지혜롭게 처신 할 수 있는가를 주님은 묻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묵묵히 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몸 하나 처신하는 일에 있어서는 지혜로울지 모르나 종말을 대처하는 지혜는 전무한 형편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13절에서 이렇게 맺고 계신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절에서도 나타내고 있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아니 세상 사람 중에서 돈을 좋아하지 않는 자 있는가? 돈 때문에 물질에 급급해서 종말론적 위기를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형편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물질에 노예가 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즉 재물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빛의 아들들인 성도는 재물에 대하여 초월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재물에 대하여 초월한 지혜 안에 거하는 것만이 종말의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지혜로 오신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성도는 가난한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이 부유함에 거하고 있는 그 자체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이요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이사야 61:1이하의 말씀을 들어 주의 은혜의 해를 말씀하고 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말씀이 곧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하셨다(눅 4:21). 누가복음 자체가 처음부터 가난하고 눌린 자,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희년으로써 가난하고 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말씀하는 가난한 자가 결코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억눌린 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15장에는 잃어버렸다가 찾는 것에 대한 비유가 나오고 16:19 이하에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나온다. 이러한 문맥 속에 어떤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의 집에서 재물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큰아들의 모습이 곧 유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으로 예수님은 공격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불의한 청지기의 상에서 잘 비쳐지고 있다. 그것은 곧 죄인들인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종말의 때를 알고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세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를 위해 대처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것은 19절 이하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재물을 초월해 있는 나사로와 같은 모습인 것이다. 종말론적 삶이란 어떤 한 시점이나 때를 알아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종말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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