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50.누가복음 15:11-32 잃은 아들 비유

불편한 진리 2014. 12. 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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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32 

잃은 아들 비유

 

본문은 흔히 탕자의 비유혹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알려진 비유이다. 이 비유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 하는 논란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있어 왔다. 최근에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이런 제목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아버지 사랑에 관한 비유”, 또 어떤 이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에 관한 비유”, 고통 당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붙여지고 있다. 두 아들에 의해 아버지는 배척을 받지만 아버지는 계속해서 두 아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두 아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적절한 제목들이 붙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목들도 결코 바람직한 제목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문의 비유는 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모든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본 비유의 중심 인물은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거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비유의 내용인즉 전반부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분배를 요청한 후 자신의 몫이 주어졌을 때에 그 재산을 가지고 가서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이 하는 돼지를 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였으나 그것조차도 주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18,21)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볼 때에 유대 종교적 관점에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유대 동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버지와 유대 동족으로부터 떠났으나 그 결과는 자유가 주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스러운 이방인과 죄의 종이 되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 마침내 굶어죽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자 결정을 내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에서 종으로 살기를 원하였으나(18,21)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2)고 하였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며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한 것은 종의 신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고 선언하면서 잔치를 벌이게 된다.

 

비유의 후반부는 밭에서 돌아온 첫째 아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밭에서 돌아온 첫째 아들은 시끌벅적한 집의 분위기를 종을 통해서 듣고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한다. 이 점은 허랑 방탕하였던 둘째 아들과 첨예하게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밭에서 돌아온 큰아들의 모습은 둘째 아들이 이방 땅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안 가문의 기업인 밭에서 땀 흘려 일했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큰아들이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버지의 잔치 배설 그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요 동시에 집에 돌아온 자기 동생을 거부하는 행위이며, 나아가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거부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아들과 함께,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 식탁을 같이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은, 마치 일찍이 둘재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생활할 수 없다고 간주하면서 재산을 가지고 먼 이방인의 땅으로 떠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행위였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행위이고 동시에 잔치에 참여한 자들 앞에 아버지에게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안겨주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체면에 개의치 않고 앞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던 것과 같이 이제 아버지는 다시 첫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8).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이 모여있는 잔치 자리를 떠나 큰아들을 달래기 위해 친히 집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에 상상하기 힘든 예외적인 행동이었다. 이렇게 함으로 아버지는 큰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그들을 대하여는 태도에 있어서 결코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본 비유에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태도이다. 둘째 아들은 집을 떠날 때에 아버지의 마음을 극도로 상하게 하였으나 돌아올 때에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죄의 인식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반면에 큰아들은 밭에서 집 가까이 오면 올수록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은 인색한 아버지로 단정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을 이제까지 어긴 일이 없다고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큰아들을 설득하고 있다. 아버지의 큰아들을 설득하는 말로 비유는 끝맺는다. 더 이상의 다른 결론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물음으로 끝맺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5:1-2).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두 아들이 동일하게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분명 지상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이고 예외적인 행동을 통하여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지상의 아버지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단순히 이 비유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누가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11:27, 17:6,26).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세리와 죄인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고 시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동일하게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기존에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을 깨뜨리심과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즉 예수님은 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신 것이었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로 나타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더욱 분명히 보여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이방인들에게는 한없는 은혜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동일하게 사랑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증거 되는 것이다. 여기에 굴복된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