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
누가복음 15:1-10
잃은 양과 드라크마 비유
누가복음 15장 전체는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림에 대한 비유이다. 이 비유들은 흔히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비유, 탕자 비유로 불리워진다. 15장의 세 비유들이 이러한 제목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과연 적합한 것인가? 제목이 어떻게 불리워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비유에 대한 제목은 그 비유의 강조점을 드러낸다고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들의 제목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내용들을 제대로 드러낸 제목일까? 우리가 본문의 비유를 살펴보기 전에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야만 선입관으로 비유를 이해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1-2절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리는 당시에 죄인의 대표상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14:35에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연유하여 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에 대한 극적인 반발심과 비방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정결법에 따라 판단하여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이르시되”(3절).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은 이런 동기로 출발한다.
본문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4-6절). 두 번째 비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8-9절).
이 두 비유의 결론은 각각 이렇게 맺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또 1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이 하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잃은 양과 회개, 또한 잃은 드라크마와 회개와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잃은 양이 스스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잃은 드라크마 역시 스스로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스스로 뉘우치고 하나님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전혀 그런 의미가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라는 말로 비유의 결론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앞의 본문을 조금 살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5:27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방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고 하셨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다면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이 회개한다는 것은 금식과 애통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정한 선지자라면 죄인들에게 이렇게 촉구하여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본문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똑같은 비난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진 회개에 대한 개념을 공격하시면서 진정한 회개란 바로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여자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금식하며 애통하는 기도가 있는 것을 회개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생각으로 눈물 흘리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을 가지고 회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기쁨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죄인들은 잃어버린 존재이다.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는 결코 스스로 잃은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다. 잃은 것을 아는 분은 목자와 같은 주님이시고,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와 같은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오셨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25-35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했었다. 예수님의 제자란 자기 소유, 곧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는 자이다. 자신의 것을 버리고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이다. 자기 소유를 버리는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를 찾으시는 분이시다. 어떤 제자인가? 바로 세리와 같은 죄인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존재는 스스로 금식하고 애통하는 기도를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친히 일방적으로 찾으신 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회개하고 주님을 따르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신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방식으로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의 은혜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회개란 우리가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이다. 잃은 양을 찾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잔치를 벌인다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러한 나라라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그것이 하늘의 기쁨이요 즐거움이기에 그것은 하늘 잔치가 되는 것이다.
결국 본문의 비유는 잃어버린 것에 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찾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유의 강조점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죄인인 자기 백성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인지 알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셔서 자기 백성을 찾으신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푸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은혜를 깨닫고 늘 주님의 십자가로 관심이 되돌려지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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