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 /
누가복음 9:37-50
변화산 아래
예수님께서 “여기 섰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9:27)고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잠깐동안이나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였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과 권세,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의 중대성을 알리신 놀라운 일을 제자들은 볼 수 있었다. 베드로는 이 일을 나중에 자신이 기록한 서신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이제 누가는 37절에서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튿날”이라고 언급한 것은 변화산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다. 산 위에서 일어난 일과 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서로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살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막상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의 상황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이었다. 변화산 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만 보이는 하나님 나라이었으나 변화산 아래는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아들을 고쳐주시기를 구하였다. 그 아이의 상태는 이러하였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39절). 귀신에게 사로잡힌 상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좌우되는 그런 형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힘에 사로잡혀 있기에 그 힘에 의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아들은 외아들이었다. 외아들이란 가문을 이어가는 아들이기에 그 집안의 희망이 될지 모르지만 그 역시 마귀의 권세에 잡혀 있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들을 데리고 온 것 같다. 마침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기에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고쳐주기를 요구하였었다(40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41절).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는 제자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43-44절).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에 놀라면서 기이히 여길 때에 예수님은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하셨다. 사람들이나 제자들은 귀신을 꾸짖어 내어쫓으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이히 여길 때에도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쳐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던 것 같다. 본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9:1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라고 말씀한다. 제자들은 귀신들을 내어쫓고 능력을 행하였던 적이 있었다. 어떤 귀신이든지 내어쫓는 권세를 가졌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귀신을 내어쫓는 일은 경험되어진 일이었기에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즉 ‘과거에 한 적이 있다!―그 일은 이제 내가 한다!’는 도식을 가지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생각해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패역한 세상의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손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패역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불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할 수 있는 자가 이 패역한 세대에는 없기 때문이다.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통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산 밑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인간을 의지하고 자기 경험을 내세우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누가는 여기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것으로 변론이 있었던 일을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런 변론이 있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47절).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다. 그리고는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48절)고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란 사람들이 보잘 것 없이 여기는 대상이다. 특히 이 당시에는 아이들을 제외한 상태에서 무리의 수를 계산하였던 때였다.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란 아주 작은 자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따라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보잘 것이 없고 별로 귀중하게 취급하지 않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가에 대한 변론이 있었던만큼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 그렇다면 천국에서 작은 자가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큰 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작은 자가 없는데 큰 자가 있을 수 있는가?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국에는 큰 자나 작은 자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굳이 세상의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작은 자가 큰 자이다. 즉 세상에서 생각하고 세상에서 판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방식과는 거꾸로 된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인정받기 위하여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작은 자로 불려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겸손하게 비쳐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하늘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온 과장된 겸손일 뿐이다. 결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서 하늘 나라에서 보상이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나타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나를 장악하고 있다면 하늘 나라에서 받을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낮은 자로, 작은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한의 질문이 이어진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49절).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았기에 요한은 그 사람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절).
요한의 관심은 귀신을 쫓아냄으로 누구의 이름이 증거되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따르는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환언하자면 요한의 관심은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자신을 따르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기에 예수님은 요한을 책망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하고 요한 자신을 따르는가 아닌가 하는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요한 너는 나를 제대로 좇고 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7-18). 바울 사도의 관심은 누가 자신을 따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있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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