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
누가복음 9:1-17
오병이어
본문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대하면 오랫동안 성경을 보아온 습관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파송하셨다는 뜻으로 바로 이해한다. 그래서 모든 전도와 선교의 기본적인 방침이나 혹은 방법을 여기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전도 방법을 찾고자 하고 또 선교의 지침이나 제자훈련의 기본 원리를 추출해 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 때문에 우리는 전도나 선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라는 것이 아니다.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제자들이나 우리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뿐이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락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1-6절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고, 7-9절은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에 대한 반응을 기록하고 있고, 10-17절에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6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셨고, 7-9절에서는 세상의 반응이 어떤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10-17절은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전도하도록 파송받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문맥을 통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8장에서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땅에 가셔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귀신을 쫓아내시고 다시 가버나움 쪽으로 오셔서 혈루병 여인을 고쳐주시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말씀하셨고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아직은 숨겨져 있는 비밀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에게 여행할 때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란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오직 복음에 관심 가진 자로서 복음을 드러내는 일을 위해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세상의 것을 더 가지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율법인가?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냈을 때에 그 복음을 거부한다면 이방인과 같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5절). 발에 먼지를 떤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땅을 벗어날 때에 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에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면 이방인으로 여기게 된다.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율법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온전한 성취자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없다. 우리가 전도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로 온전히 이루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복음을 드러냄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공개되며 성도에게서 확인되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로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드러날 뿐이지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삶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전도란 결코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다(고전 1:21). 이렇게 본다면 본문은 단순히 우리에게 전도하라는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좀더 폭 넓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전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운명이요 또한 우리의 운명이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헤롯의 반응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드러나게 되자 헤롯의 반응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는 모습이 아니라 요한이 살아났는가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는가 또는 옛 선지자가 다시 살아났는가 하는 쪽으로 관심이 쏠리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상의 반응이다. 누군가 복음을 드러내면 우리는 전도를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빼앗겨서 말을 잘 한다든지 대단한 사람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가셨으나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10-11절).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행한 것을 예수님께 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라는 마을로 가셨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듣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 제자들은 무리들의 먹을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해결하도록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3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13절).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먹을 것을 돈으로 사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죄를 보라는 뜻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을 드러내었다. 실로 주머니나 전대, 옷을 가지지 않고서도 복음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많은 사람, 약 장정만 5000명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죄성으로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16-17절). 남은 것을 거두게 하신 것은 오늘날 환경 문제가 심각한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을 확인하게 하시는가? 예수님과 더불어 거한다면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풍성함에 거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삶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다(1-6절).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한 공상에 지나지 않거나 공허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이적을 통해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게 된 것이다.
삶에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제자들의 죄악이고 바로 우리의 죄악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으로 생각한다면 굶어도 괜찮고 세상에서 죽임을 당해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모자람이 없는 풍성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삶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삶이 아니다. 무엇인가 모자라고 부족함이 있으며 결핍이 있는 삶은 죄악된 이 땅에서의 삶이다. 결핍이나 부족함 등은 죄로 말미암아 오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에 거하고 복음만 드러내는 일로 산다면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는 주님이 책임지시는 문제이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사로잡힌 자가 성도요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5.5).
'●──── 신약강론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누가복음 9:37-50 변화산 아래 (0) | 2014.12.17 |
---|---|
29.누가복음 9:18-36 변화산 (0) | 2014.12.17 |
27.누가복음 8:40-56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 (0) | 2014.12.16 |
26.누가복음 8:26-39 군대 귀신을 쫓아내심 (0) | 2014.12.16 |
25.누가복음 8:16-25 바다를 잔잔케 하심 (0) | 2014.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