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29.누가복음 9:18-36 변화산

불편한 진리 2014. 12. 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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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18-36 

변화산

 

9장의 전반부(1-17)는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또한 그 나라의 실제적인 모습을 이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반응은 주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구약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구약의 옛 틀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기를 원하셨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비록 수천명이 떡과 고기를 얻어먹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아직 숨겨져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것은 분명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 배불리고자 행하신 이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것이 이적을 행하신 의도의 전부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목적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이고 함께 거한다면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반응을 물으셨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 예수님이 사람들의 반응을 몰라서 물으신 것일까? 아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예수님을 거부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반응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결코 바르지 않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기 전이나(9:7-9) 후에나 사람들의 반응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적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20)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라는 고백이다. 마태복음 16:17에 의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베드로 스스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리들에게는 아직 하나님 나라가 비밀로 부쳐지지만 제자들에게는 알려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제자들이 밝히고 드러내어야 할 것은 없다. 그래서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21)고 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곧 그 사실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22)고 밝히신다. 생명의 주님께서 언약을 따라 오신 그분이 어떻게 말씀을 성취하게 될 것인지를 밝히신 것이다. 인간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그것을 밝히셨다.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일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일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혹시 제자들도 이쯤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면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채워지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좇으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연관하여 제자들의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3-24).

 

예수님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을 먼저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책임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 십자가란 단순히 교회에서 회의를 하면서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라고 하였을 때에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라고 하는 식의 앞에 나서서 책임을 지겠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십자가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신봉하고 기존에 종교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인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들에 의해 버림을 받아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단순히 넘겨버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구약의 옛 틀에 의해 버린 바 되신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이라는 옛 틀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알 수도 없으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게 된 것은 생명을 누리는 것은 율법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의해서만 발생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무엇을 얻고 받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버리면 구원을 얻는데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란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으로 말미암아 받아 누리는 은혜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버리심으로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오병이어라는 것으로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에만 푹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무엇인가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식으로만 생각하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아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베푸신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원에 골인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기에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28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세 제자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29절 이하에 보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29-30)고 변화산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쉽게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신 것을 볼 수 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눈 대화가 예루살렘에서 별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즉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과 결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원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세란 구약의 율법서요, 엘리야란 구약의 선지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구약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율법을 따라 사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메시야가 와서 대속의 죽음을 죽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의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구약 성경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편의대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들이 고수하고 있는 생각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이 베드로를 통해서 그대로 폭로되고 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결코 인간이 짓는 집이 아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발언한 것이 자신의 집은 언급하지 아니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지도 모른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35).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것을 거부하신다. 우리의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36)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다. 율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로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모세나 엘리야가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십자가만 증거되어지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