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27.누가복음 8:40-56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

불편한 진리 2014. 12. 1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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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40-56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

 

본문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이 고침을 받는 두 개의 이적을 한데 묶어서 기록하고 있다. 40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땅에 가셔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다. 군대 귀신들이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 떼가 비탈길로 달아 낭떠러지로 떨어져 몰사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마을에서 떠나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 쪽으로 오셨을 때에 거라사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이렇게 환영하고 있는가?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이렇게 영접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기들의 병고침이라는 다급한 문제에 직면하였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쪽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신을 찾고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다. 결국 누구든 자신을 위해 신을 섬기며 믿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란 이런 인간의 욕구에 의해 발생된 것이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다급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요청하고 있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41). 거라사인들은 자기 마을 사람이 귀신에게서 놓임 받는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에 함께 동참하지 못하고 돼지 떼의 몰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분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그 마을에서 떠나주기를 요구하였지만 야이로는 자기 딸이 죽어간다는 다급함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들은 자신들의 손해와 이익과 결부되어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존재이다. 이를 두고 성경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를 위해 신을 이용하고자 하는 그것이 곧 선악과를 먹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성경은 밝혀주고 있다. 야이로의 요청에 예수님은 응하시게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야이로의 요구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이 때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4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며 따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때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오게 된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43-44). 여인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에라도 손을 대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질병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예수님을 향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45)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답변은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45)라는 것이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에 누구든지 예수님께 접촉 될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능력이 나갔다는 사실을 아셨다. 다시 말해서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여인의 질병을 고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네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그녀의 질병을 고쳐주셨는데 누구인지 몰라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공개적으로 그녀를 무리 가운데서 드러내고자 하신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인이 혈루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만나기를 원하셨다. 대면해서 그녀와 말씀의 관계를 갖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어떤 메시야로 드러내고자 하시는가? 혈루증이란 레위기 15장에 의하면 인간의 부정함을 보여주는 질병이다. 혈루증이 있는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되는 사람은 다 부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을 통해 인간의 죄악이 곧 죽음이라는 부정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을 율법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을 공개적으로 불러내셔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고 말씀하심으로 여인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음을 선언하셨다. 율법은 사람을 부정하다고 규정함으로 인간의 죄인 됨을 보여주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주어지는 은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은혜와 율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병고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여인을 공개적으로 불러내셔서 인간의 부정함, 죄악 됨을 능히 이기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며 말씀의 교제를 이루는 메시야가 곧 자기 자신이심을 드러내셨다.

우리의 더러움이나 부정함이 예수님을 더럽히거나 부정하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거룩이 우리의 부정함을 이긴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 율법에서 요구하는 부정함에서 벗어난 완전하고 거룩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악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에 합류됨으로 우리가 깨끗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에게 넣어주신 믿음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라도 병고침을 받아야 하겠다는 미신적인 행동이 그녀를 구원받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믿음이 여인에게 주어졌기에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예수님은 여인에게 확인시켜주시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혈루병에서 나음을 입은 여인에게 구원의 평안을 확인하시는 말씀 도중에 회당장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49).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고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끝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이라도 손을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달랐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52).

잔다고 표현하신 것은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나라를 가져왔음을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으로 끝이고 그것이 절망이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잠을 자는 차원의 것으로 다시 일깨워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구원과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희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웃었다.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53).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54)고 말씀하시자 아이가 일어났다. 아이가 다시 살게 된 그 정황을 이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55).

여기서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은 나갔던 영혼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는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성경이해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지 않고 언제든지 전인(全人)으로 말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영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상태를 육으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아이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의미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가 죽음이라는 부정함도 극복하는 것임을 드러내셨다. 율법이라는 옛 틀에서는 죽음을 부정한 것으로 말씀하고 거기서 늘 자신을 씻고 깨끗하게 하여야 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시고 생명되신 예수님은 인간의 부정함과 죽음을 극복하고 능히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고 비밀이다. 이 비밀은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내시기 전까지는 아직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56)고 당부하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