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
누가복음 5:27-39
레위를 부르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 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음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주의 은혜의 해로 오신 예수님은 질병에서 놓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목적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심으로 그것을 말씀하고자 하신다.
27절에 보면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도 예수님은 우연히 레위를 만났기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 사함의 권세에 대해서 나타내신 후 의도적으로 나가셔서 레위를 만나셨다. “그 후에 나가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밝혀준다고 하겠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한 마디로 말씀하셨는지 아니면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가 이 한 마디로 기록을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레위가 그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얻는 것은 죄인이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죄 사함의 은혜를 얻는 것은 인간 편에서 주님께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서 죄인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주시는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의 세리란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일을 하였고, 또 대부분의 세리들은 로마 정부에 바쳐야 하는 금액보다도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여 착복하였기에 세리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은혜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되는 세리를 부르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시기 위하여 철저히 낮아지셨다.
레위가 말씀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게 된 그의 순종을 높이 평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나를 좇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레위가 순종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죄인은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위의 입장에서 말씀을 거부하고 안하고 하는 차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셨을 때에 빛이 순종하려고 해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냥 빛이 말씀대로 있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레위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위가 자기 집에 큰 잔치를 열었다는 것은 아마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달았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죄 사함의 은혜가 죄인을 지배하게 될 때에는 당연히 기쁨의 회개와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위는 잔치에 세리와 다른 사람을 많이 초청하였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29절).
이런 본문을 가지고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원의 은혜를 입고 깨달았으면 감사 헌금을 비롯한 많은 물질을 교회에 바쳐야 할 것을 교훈 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죄 사함의 은혜가 죄인에게 주어지면 당연히 회개와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그것도 물질로 표시를 해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곡해하는 것이 된다.
레위가 예수님과 더불어 잔치를 벌인 것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하늘의 잔치와 방불한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고 하늘 나라에서 누리는 구원의 기쁨을 잔치로 설명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을 근거로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6-9).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개와 감사의 잔치가 있는 반면 한 편에서는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0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였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 있다면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어울림으로 같은 부류인 것처럼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시비를 걸고 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시 분명히 밝히셨다. 즉 죄인을 부르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고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온전히 복종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또 다시 세례 요한을 들어서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답변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4-35절). 여기서 신랑과 함께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신랑과 함께 있다는 것을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현장으로 이해한다면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금식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단순히 금식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계시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주신 것인가를 말씀하신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지고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죄 사함의 은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얻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제 율법에 의해서 구원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성취자가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랑과 함께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완전한 이스라엘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이스라엘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기회는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비방하고 배척할 경우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때에는 참으로 금식하고 슬퍼하며 통곡할 날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6-38절). 이 말씀은 율법을 통해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의도가 다 드러났음으로(롬 5:20),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은혜를 좇아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구약에서 율법으로 말씀하신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옛 틀, 모세의 율법, 구약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은혜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비록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고 미리 가리킨 것이 사실이며 구약 시대에 제사 의식을 통하여 이 은혜를 받아 누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옛 틀로는 모든 약속과 은혜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은혜의 새로움을 도저히 담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 틀은 이제 폐기될 수밖에 없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둘째 것을 세워졌기에 첫째 것은 폐하여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새로운 기준으로 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 낮은 곳으로 찾아오셔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나의 공로,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가 성도이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9절). 기존의 것을 유지하려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고수함으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것은 죄의 본성이다. 그 죄의 본성에 의해 나오는 것이 우리의 행위이기에 나의 행위는 철저히 거부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에만 사로잡혀서 살아가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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