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05.요한복음 2:13-25 성전

불편한 진리 2014. 11. 14. 19:14

제5강

성 전

요한복음 2:13-25


많은 교인들이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구약에서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율법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신앙생활을 가져오게 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하나님은 약속에 의해서 다스려 나가십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나 절기들은 전부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심지어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도 다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의 예수님 당시에나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 자체를 잘 수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성전이나 금식, 십일조, 안식일 등을 문자적으로 행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성전과 그것에 관계된 제사 제도들, 절기들, 여러 가지 율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자 했던 메시야에 대해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왜곡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예배 의식을 행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주일성수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핵심을 놓치는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흔히 말하는 성전청결”(?)에 대한 본문입니다. 지금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성전정화 내지는 성전청결 정도입니까? 예수님은 인간들이 더렵혀 놓은 것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계속해서 살펴오고 있지만 처음부터 제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두움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에게서는 도무지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여망이 없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인간은 의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의 장사로 더러워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인간에게 희망을 가지시겠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정화내지는 성전청결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셔야 맞습니다. “! 이제 성전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다시는 장사하는 일이나 돈 바꾸는 일로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하는 일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는 말씀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이해로는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되어서 성전에 가셨을 때에 성전은 장사하고 돈 바꾸는 사람들로 북적되었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1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고 대답하셨습니다. 과연 성전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후 가나안 땅에 완전히 정착한 솔로몬 때에 고정된 성전으로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직 여기서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죄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성전이 아니면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될 자들이 사람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아니라 시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인간들의 죄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성전을 재건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이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 행위를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 성전을 파괴하고 새로운 성전, 3일 만에 세워지는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즉 새로운 성전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예수님 몸이 새로운 성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교제의 통로가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서 자신을 제공하러 오셨습니다. 그것을 구약에서 성전으로 가시화해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전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모습은 세례 요한이 두 가지로 증거했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1:33)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적 죽음에 근거해서 성령님에 의해 믿어지게 되는 십자가 사건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아니 두 개의 성전이 존재할 필요가 없고 오직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만으로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이 개인적인 정결 의식을 공격하신 것이라면, 성전 소란은 이스라엘 전체가 귀중히 여기는 성전을 공격하심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종교 행위에 대하여 공격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성전을 공격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1:10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제사의 기름에 배불렀고, 동물 제사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일이 되기에 헛된 제물을 아예 가져오지 말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성전을 수리하고 제사 제도가 회복된 때에 오히려 성전 문 앞에 서서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7:4)고 외칩니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공격한 이유는, 그들의 생활 때문이었습니다(참고 사1:16-17;7:5-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제사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7:22-26). 성전 자체에 얽매이거나 제사 의식 자체에 의미를 두는 신앙이란 애초부터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성전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라고 하는 포장지에 싸여진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이라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허물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나 중심의 기도라면 지금 허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서 위해서 하는 찬송이라면 유행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주간의 액땜이라도 하겠다는 식으로 드려지는 예배라면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것과 무엇과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허물고 깨뜨려고 버려야 합니다. 교회가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단이나 말씀에 권위가 없는 교회일수록 강단의 높이를 높입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엄숙함과 경건성에 위축되도록 치장을 합니다. 또 화려하게 꽃으로 장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배당 자체에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고 거룩한 척 폼을 잡습니다. 목사에게는 권위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의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목사의 권위로 강단에 연예인들을 세웁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마치 말씀의 권위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게 만듭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라는 것에서 관심이 멀어진 결과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구원이란 나의 일생이 어느 방향으로 길이 잡혀 있느냐의 문제로써 소유가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것들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19960630/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