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하늘이 열리고
요한복음 1:35-51
인간은 누구나 다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관(神觀)은 보통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서 들어온 산신령에 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도 이러한 신에 대한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이런 신관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염이 긴 할아버지 같은 분이 근엄하게 폼을 잡고 계시다가 인간이 부르면 한 번씩 나타나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해결사 내지는 수호신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흔히 잘 알려진 그림처럼 턱수염이 덥수룩한 분이 인자한 얼굴로 나타나셔서 나의 상담자가 되시고 나를 여러 가지 위해로부터 보호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사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얼마나 예수님에 대하여 수호신 정도로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죄인의 수준에서만 예수님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통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성경이며, 그 성경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배우면서 거기에 더 우리 생각을 보태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우리 사고에 맞지 않으면 뺄려고 하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철저히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알아지는 예수라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알아지는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탕으로한 신앙이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보냅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그리스도)를 만났다”(41절)고 증거하고 예수님께 데려오니 ‘게바’(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셨을 때에 “나를 좇으라”(43절)고 하셨습니다. 또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절)고 증거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49절)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가지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자마자 전도에 힘썼으니 우리도 전도에 힘쓰자’라고 강조한다면 본문을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를 필두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다양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따르게 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랍비”, “메시야”, 혹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 이”, “하나님의 아들”, 또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하는 증거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증거들이 정확하다면 예수님이 굳이 자신에 대하여 또 증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1장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의 이해와 증거에 대비해 예수님이 자신을 어떤 분으로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장에서 처음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계시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51절)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8:10-22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형 에서와의 다툼에서 두려워 하며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사닥다리를 보여주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설치하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찾아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오시더라도 굳이 사닥다리가 필요없는 분입니다. 그러면 이 사닥다리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야곱의 사닥다리 사건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하늘이 열리고”라고 했습니다. 본래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것에서 벗어나 하늘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시도하자 땅도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희망이 생길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스스로 빛을 찾는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늘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을 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지 않으면 인간은 희망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였다고 이미 1장 초반에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내려오셔야만 죄인의 구원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인자”(人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 7:13-14에 의하면 “인자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와서”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인자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구름을 타고 오니까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늘이 열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도 비로소 소망의 터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인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세상)은 예수님을 싫어하여 거부함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즉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인자(人子)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습니다. 기존의 이 땅에는 희망이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님이 인정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두시고자 하시는 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운명과 같이 될 때에만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희생되는 어린 양되신 주님의 운명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거부당하고 세상에서 버린바 되어지는 어린 양과 같이 희생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주님을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에 대한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우리와 관계없는 신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왜 나를 도와주지 않고 말씀대로 살았는데 왜 어려운 형편이 좋아지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의도나 우리의 생각에 발맞추어 춤추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주님이 훨씬 주님다우신 분아닙니까? 오히려 십자가의 길에서 자신과 함께 가자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죽었는데도 오늘도 또 나에게 다가 오셔서 “나와 같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제까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되었는데 오늘도 또 주님 자신과 함께 죽자고 요구하시는 주님을 위해,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셨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19960616/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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