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약속의 아들 예수
사도행전 13:13-43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나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요즘 소위 말하는 신세대라고 하는 청소년들이 쉽게 내뱉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 때문에 기성세대인 어른들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우리는 과거에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의 어른들이 어릴 때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그 때는 나에게 싫어도 싫다고 직접 그리고 강하게 표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싫어도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이 미덕이었고 예의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과 어른들의 차이점은 직접적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표현하느냐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고 보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그 때가 우리의 죄악이 더 교묘하게 위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세대와 기성세대가 누가 더 악하냐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제보다는 오늘에 와서 죄가 더 노골화되고 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죄가 날마다 더 직접적이고 다양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고 또한 이런 말씀 강론을 듣는 이유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행한 강론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첫 강론입니다. 바울은 강론의 시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16,17절).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말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강론에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핵심이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절).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32,33절).
당시 상황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이방인들도 유대교에 입교하여 회당에 와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유대인들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믿고 있는 그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의 아들로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아직 그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지도자들이 살아 있습니다. 그들에 의해 예수는 흔히 있어 왔던 선지자나 아니면 이단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 사도는 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인간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믿을 자는 없습니다. 그냥 그저 자신을 적당히 숨겨가면서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표방해야 합니까? 하나님 믿으면 예수는 거기에 포함되어서 믿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알고 있다면 기독교를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기독교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예수를 덤으로 믿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만이 약속을 성취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30절).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바를 지상에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보아야만 제대로 본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상에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된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도 십자가란, 단순히 책임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며 포기하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여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가짜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사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상황, 특별히 그 당시의 정치적인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현장에 있기 때문에 쉽게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남긴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버리고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관심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를 해도 내 소원이 앞세워지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내 영광을 위한 예배입니다. 전도를 해도 교회에서의 내 명예와 관련되어 있고, 교회 봉사를 해도 내가 받고자 하는 천국 상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무관합니다.
십자가와 무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마치 옛날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안심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피를 믿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구원에 왜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왜 죄를 이기는지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사했으니까 그것을 믿는 나는 죄를 용서받았고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있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죄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나오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예배당에 나올 때만큼은 죄를 짓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십일조 하는 자기를 사랑하고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기도하고 헌금하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죄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죄라고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지적하는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막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9에 보면 그것은 귀신도 알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십자가가 목표인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거쳐 가는 어떤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목표였습니다. 이 땅에 오셨을 때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인용했던 시편 2편에 의하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 좀 더 읽어 내려가 보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2)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은 남아선호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에 의해 낳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연합되어 그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전도를 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를 제대로 정립시키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건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젊은 자들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기 때문에 망합니다.
재물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가 어려워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 수완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하에 제사지내 줄 아들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의 묘를 잘못 썼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에서 망한다는 것은 졸지에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권하기를 성경 매일 3장, 주일에는 5장 읽고, 1년에 전도 한 사람 이상씩하고, 기도는 하루에 30분 이상하기 위해서 새벽기도회에는 절대 빠지지 말라는 식의 강요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43절)고 권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베푸신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속에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죄를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내 공로인 것으로 여기지 말자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의 은혜인줄로만 압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십자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강론한 후에 그 강론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인가 하는 기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없었습니다. 시기로 비방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습니다. 51절에 보면,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발에 티끌을 떨어 버렸다는 것은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절)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일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기쁨과 성령이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52절).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커 가는 일에 기쁨이 있습니까? 교회의 재정이 튼튼해져 가는 일에 기쁨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을 자는 받고 받지 못할 자는 받지 못하는 그것이 또한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습니다(마 11:25-27).
내 형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십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의 죄를 위장하고 의로운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위선만 남을 뿐입니다. 십자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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