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15.히브리서 6:13-20 우리의 소망

불편한 진리 2014. 6. 30. 21:09


우리의 소망
히브리서 6:13-20
 
우리는 신앙생활 하는 것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생활하면서도 신앙생활 한다고 착각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 생활이란 어떤 것이고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종교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단히 신을 찾고 찾는 것입니다. 출발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 생활이란 모든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의 중심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구원이라는 열망에 사로잡혀서 성경의 어떤 것도 자기 구원과 연관시켜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에 의해 붙들려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단히 자기 백성들을 찾고 찾으시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미친 듯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십자가에 비추어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기준을 가지고 신앙을 점검한다는 것은 종교 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자기 기준에 의해 점검하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확신, 자기감정에 의존하도록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기분이 무척 좋으면 구원받은 것 같고 그렇지 않고 기분이 나쁘고 부부싸움이라고 한 상태라면 구원받은 것 같지 않은 기분을 가지는 것입니다. 재물이라도 있어서 헌금을 조금이라고 흡족하게 했으면 천국에 가까이 간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멀어져 있는 듯 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는 자기 기분, 자기 확신, 자기 감정, 자기 환경에 철저하게 매여 있습니다. 감정의 변화, 환경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늘 흔들립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내 기준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제시하신 기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기준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이쯤 되면 우리는 당연히 십자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여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중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항상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지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있는가를 날마다 점검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서 판가름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갈 5:24)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날마다 육체와 함께 세상적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도록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인내를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따라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6:12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 있었습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면서 맹세할 자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맹세란 16절에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더 이상 다른 것이 없다는 뜻에서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최후 확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맹세하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맹세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말과 행동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말씀이나 행동이나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맹세를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17,18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맹세를 하신 이유는 인간의 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 역시 죄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란 무엇입니까? 약속과 맹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맹세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맹세를 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하면 약속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걸고 맹세까지 하셨느냐 하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을 때에 이미 하나님과 결별하기로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약속대로 기업을 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믿어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은 것입니다(19절). 우리가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계획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며 일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며 너무도 확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분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분에게서 나온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을 걸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맹세를 하셨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죄악을 폭로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피하여 가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소망이 되고 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정합니다. 질병에서 고침받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인양 말합니다. 과거에 제가 어떤 교회에 있을 때에 교인 중의 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여 갔더니 옆 침상에 있는 환자를 그 교회 목사님이 심방 온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병실이 떠나갈 정도의 큰 소리로 그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데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을 말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마가 물러갈지니라! 주님께서 이 병자를 반드시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그 목사를 볼 때에 믿음 없는 사람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믿음을 과시라고 하듯이 ‘믿습니다!’를 연발하였습니다.
이런 광경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질병에서 속히 고침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처럼 외쳐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14절에 보니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이란 무엇입니까? 19,20절에 의하면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으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것이라고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복이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휘장이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성막에서 지성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이며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속을 이루시고 승천하셔서 구속을 온전히 이루신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구약의 성막에 대한 용어를 가지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늘 지성소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심으로 대속을 온전히 성취하신 주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10에서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아론의 반차를 능가하고, 아론이 행한 불완전한 대제사장의 모습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에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에 의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구원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것이기에 흔들릴 수 없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것 외에는 복이 없습니다. 복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말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바로 예수님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이 복을 받았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불러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가신 것입니다. 앞서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론의 반차를 좇는 구약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자기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또한 날마다 동물을 잡아 피를 흘리며 누군가 피를 흘려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이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다시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과 칼로 지키신 것은 누구든지 하늘 지성소, 생명의 에덴동산으로 가려는 자는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심판을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그리로 앞서 가셔서 모든 심판을 제거하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담대히 주님을 따라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휘장이란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십자가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 자입니다.
휘장 안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마다하는 자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십자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생활입니다. 세상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소망이 된 자가 성도입니다. 주님이 가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가는 것입니다. 단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따라갈 뿐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등장합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했습니다(마 19:22).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선한 행위를 가려서 하는 것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단독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고 단독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죄의 습성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록자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소망으로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에 날마다 주님을 따라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사시기 바랍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