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16.히브리서 7:1-3 멜기세덱과 예수님

불편한 진리 2014. 9. 9. 19:58


멜기세덱과 예수님

히브리서 7:1-3


사람들은 시간에 민감합니다. ‘바쁘다혹은 한가하다라는 말도 시간을 의식한 것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없다면 바쁠 이유도 없고 바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창세기 1:14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이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했습니다. 빛 때문에 낮과 밤의 구별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대자연의 변화성입니다. 자연의 변화성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이미 갖고 있던 것입니다. 그 자연의 변화성을 따라 기계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의 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변화에서 다른 변화까지의 간격을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자연의 변화와 차이성을 따져서 정리할 줄 아는 인간의 인식 본능입니다. 자연의 변화가 없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시간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시간에 순응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에 늘 쫓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시간 안에 주어진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으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시간의 흐름이 있다고 인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우리 자신이 통째로 맡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아낀다 혹은 허비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면 가진 바 목표를 이루어내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허비하였다면 자신의 가진 바 목표를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도태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얼마만큼 많은 효과를 내었는가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재물을 많이 모았는가 혹은 얼마나 높은 수준의 학력을 가졌는가 하는 것도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간 사회는 시간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마침내 시간이라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죄악 된 모습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영원성에 자신을 맡기고 시간을 초월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시간에 맞추어 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언제까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을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세와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시간에 의해 어떤 것이 결정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의해 가치성이 결정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영원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의 변화에 의해 가치 기준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확정된 나라입니다. 그 피를 믿는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고 사는 자여야 합니다. 영원한 시간, 즉 영생에 흡수된 자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5장에서 아론과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5:11)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자와 젖먹이에 대하여 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구약 성경을 가지고 율법에 매여 있는 그 차이를 잠간 설명했었습니다.

구약을 붙들고 율법에 매여 있는 자가 젖먹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모든 약속이 성취된 것을 믿는 자가 장성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젖먹이에서 장성한 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지금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1). 창세기 14장에 보면 멜기세덱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이 북쪽 네 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에서 기른 318명을 데리고 가서 네 연합군을 물리치고 빼앗겼던 조카 롯과 재물과 소돔과 고모라 성의 모든 백성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을 맞으러 나간 자가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고 또 한 사람은 소돔 왕 베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영접한 이 두 사람은 전혀 대조적이었습니다.

소돔 왕은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맞이하러 나왔지만 그것은 형식적 영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구출된 소돔 사람들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물품들은 아브라함더러 취하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공적에 대하여 보상을 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였습니다. 한 족장이 개인적으로 길리운 용병으로 소돔을 중심으로 한 다섯 나라를 패배케 한 북쪽 네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승리가 소돔 왕에게는 수치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소돔 왕은 자기 왕권의 권리 회복만 생각해서 자기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맞이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4:20)라고 했습니다. 실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을 데리고 가서 북쪽 네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지금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 편안하게 여겨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래 살던 곳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우여곡절 끝에 이곳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의 친척과 그 땅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족속들로부터 아브라함은 심각한 위협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북쪽의 시날 왕, 엘라살 왕, 엘람 왕, 고임 왕이 연합 전선을 편 족속들을 318명의 군사로 물리치게 된 것은 도무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주었는데 떡과 포도주는 그 땅의 소산입니다. 이런 점에서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준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준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북쪽 네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과 같은 그러한 승리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은 이제 아브라함이라는 것을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약속의 본질적인 뜻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인정한다는 뜻으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내 것에서 십분의 일을 떼서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려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히브리서 기록자는 여기서 멜기세덱을 등장시키고, 왜 멜기세덱과 연관시켜서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멜기세덱은 창세기 14:19에서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살렘 왕이었고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도 2절에서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멜기세덱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사람들은 무익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멜기세덱을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로 해석하는 어처구니없는 설명이 있어 왔습니다. 멜기세덱은 구약에 나타난 실존적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서 멜기세덱을 존재케 하는 그 어떤 근거가 전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전혀 그것을 밝히고 있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 약속의 어떤 한 면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지금 한 인간으로서의 멜기세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의 영원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관련하여 그에게서 보이는 같은 유사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멜기세덱의 존재를 설명하는 족보가 없습니다. 그저 홀로 홀연히 등장하였다가 사라지고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 그가 또 어떻게 아브라함을 맞이하러 나왔는지, 또한 그의 죽음이 어떠했는지 그의 결말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의 관심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영원한 것으로 보아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영원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에서도 밝혀주고 있듯이 멜기세덱을 제사장이라고 소개한 데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멜기세덱이 왕이면서 제사장으로의 기능을 한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제사장적 역할이요 또한 왕으로서 일하신 영원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실제 인물이 아브라함을 만난 것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당시에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과의 만남은 멜기세덱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나님 나라를 아무나 볼 수 있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왕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는”(5:1) 것이고 또한 그것을 위해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6:18,19). 아론이 행한 것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그런 자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을 방불케 하는 영원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는 것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축복하지 못하고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축복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분명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멜기세덱이기에 그는 구약의 레위 지파보다 더 위대한 자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면 이는 레위 지파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보다 더 큰 제사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은 여러 명이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쇠하여 죽고 그 후손이 그 직분을 이어 받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제사장 직분은 한시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생명의 끝도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계통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선언함으로 구약 성경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우습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고 탁월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대속의 은혜는 멜기세덱을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진정한 의가 되시며 그로 말미암아 누리는 진정한 평강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구약의 멜기세덱을 인용해서 본문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은 단순히 제사장으로서 대속의 은혜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계속 그 은혜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속 다스리시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입니다. 그래서 시편 76:2에서는 멜기세덱이 다스렸던 살렘은 지리적인 의미에서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온이라는 의미로 바로 연결시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있는 상태가 시온이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십자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왕이신 그분께, 그 나라에 흡수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왕이신 예수님께 흡수되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십자가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성도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시간이 얽어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에 흡수된 상태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생명에 매여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믿는 성도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으로 끌어내려서 이 땅의 수준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하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발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간 안에 하나님 나라를 가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의 나라 평강의 나라를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으로 낮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에 관심 가지는 자가 아니라 삶의 형편과 상관없이 대제사장이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친 듯이 바라보는 자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