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14.히브리서 6:9-12 약속들을 기업으로

불편한 진리 2014. 6. 30. 21:08


약속들을 기업으로
히브리서 6:9-12
 
사람은 누구나 간섭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간섭받는 것을 좋아해서 간섭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인사치레로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 구체적으로 간섭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누구다 다 자신이 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 외에 어떤 자도 왕으로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인간은 자신이 왕이 되고 창조주가 되어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창조 작업까지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된 나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완전한 왕국을 늘 동경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것을 건설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것도 범죄 한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왕국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든 아내든 서로 주도권을 쥐고 다스리고 싶어 합니다. 이를 통해 꿈꾸는 것은 자기 왕국의 행복과 평화입니다. 행복과 평화를 추구해 감에 있어서 어떤 세력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거부합니다. 요즘은 자녀를 출산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자녀 낳기도 포기하는 그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왕국이 확고히 서기를 바라기 때문에 누군가 간섭하기만 하면 전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에게 아부하고 충성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것이 아부라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방향으로 계속 발전시키고 자신의 나라를 키워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확대, 자기 발전, 자기 성숙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죄의 본성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8에서도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조차도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죄인의 습성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그 하나님이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사사건건 간섭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뜻대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어디로 이끄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을 예를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는 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애굽에서 고생하며 애굽의 노역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세의 출현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지시하는 대로 애굽에서 나오면 되었고 홍해를 건너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히브리서 3:16-19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서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지시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까? 율법에 대한 절차를 지키지 않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명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3:19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믿음이 없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으면 되는가? 믿음을 가지면 되는 것 아닌가? 믿으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못 믿었을까? 수시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서 그런 것이니 우리는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누구도 믿지 못하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 신뢰하고 자기 자신만 키워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서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히브리서 2:15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한 면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을 마귀의 종으로 붙잡혀 사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이 마귀에게 매여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결국 생명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워서 광야를 인도하게 한 것은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히 3:5).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8-10).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기에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예수님 그분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므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히 4:16).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것만이 은혜의 보좌에 갈 수 있는 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조건 믿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인간은 누구도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주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은혜의 보좌로 인도하시게끔 되어 있습니다.
결국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끄시는 기준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를 통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구약 시대와 다른 차원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2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한다’는 것은 바로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어떻게 언약의 본질을 드러내셨는가 하는 것에서 이미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매여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보다 아직까지 구약을 붙들고 구약 성경 안에서 자기 구원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자가 젖먹이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있는 자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될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면 될까? 세례 받고 안수 받으면 안전한 구원이 될까? 자신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어떻게 될까? 이런 종교적 지식에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대속하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매이지 않고 구약에서 계시하고 있는 언약을 통해 율법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자입니다.
9절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가는 그러한 상황보다 훨씬 구원에 가까운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를 그림자로 보여주는 그러한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실체가 온전히 다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에 가깝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르는 입장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간이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인들로 하여금 그냥 하나님을 믿도록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셔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하나님이 늘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의해 나온 행위만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주신 십자가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위를 수 없이 강조하였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4-10).
빌립보서 2:12,13에서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행위와 사랑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내거나 스스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말씀하고 있지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행위가 전혀 가미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행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확정하신 사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1-5)라고 했습니다. 확정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몸만 남기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누가 포함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은 잘라내고 버리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을 확정하신 그분이 우리를 늘 간섭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몸임을 확인하도록 십자가로 내몰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장성한 자입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