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말씀
히브리서 5:11-14
기독교에는 ‘성화’(聖化)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흔히 이 교리를 가지고 예수를 믿은 이후에 점점 더 거룩하게 되어져 간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예수 믿는 생활을 통해 자신을 다듬고 가꾸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나 목회자들은 바울서신에 나오는 명령법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신분을 확정해 주는 직설법도 있지만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실제로 행해야 하는 윤리적인 명령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나 바울서신에 나오는 명령은 단순히 율법적 기능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에 충만하면 그 말씀대로 준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평생토록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성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진리와 거리가 멉니다. 아니 이러한 교리는 교인들을 계속 교회라고 하는 목회자의 자기 사업장에 묶어놓기 위한 헛된 속임수요 인간의 교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믿었으니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신앙 자체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이 땅에서 계속 거룩을 쌓아나가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자가 된다는 이론은 윤리 개념입니다. 이런 윤리 개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자신을 다시 가꾸고 다듬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신앙이란 자신을 다듬고 가꾸어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며 거룩한 존재인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신은 철저히 십자가에 죽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신앙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가 드러나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속에 살아계신 분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종교입니다. 내 노력과 지식을 합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점차 완전해지고 거룩하게 되어 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살면 살수록 거룩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안보이던 죄까지 다 드러내게 됩니다. 이전에 한 번 내 속에서 튀어나오는 죄를 억누르고 참았다고 해서 또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또 다른 상황이 닥치면 내가 억누르고 싶고 죄를 드러내지 않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언젠가는 내 속에서 죄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에는 작아 보이고 대수롭지 않는 죄가 오래 살면 살수록 크게 보이고 심각한 죄악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오래 산만큼 자신의 죄에 대하여 더 심각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성화라고 한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고 또한 참으로 심각하게 성경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룩이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고상한 인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분리’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 거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죄 아래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죄가 왕노릇 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죄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거룩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룩이란 속된 세상의 반대 차원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과 죄와 관계된 모든 땅의 영역들을 무조건 속되고 거룩하지 못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하늘의 영역만 거룩합니다. 하나님만 거룩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 외에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에 합류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죄인들을 거룩의 영역에 들어오도록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어떤 것으로도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1-14).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으로 단 번에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거룩에의 길로 열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그 피를 이용해서 그 길로 나아가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능력조차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의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피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그 피 뿌림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거룩에 합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서론을 길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성화의 교리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는 성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영역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성화의 교리에 대하여 살펴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저주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비거룩의 영역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에 합류된 상태의 영역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영역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회색 지대로 점점 더 거룩해져 가는 영역은 없습니다. 차츰 차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는 과정의 영역은 없습니다. 한 마디로 거룩이나 비거룩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 본문을 상고해 보도록 합시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제목으로 10절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가를 생각했었습니다. 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아론의 반차로 오시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셔야 되었던가 하는 것과 연관된 문제로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기는 듣고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구약을 붙들고 율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히브리서 기록자의 선언에 대하여 의심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면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이 정당하지 유다 지파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아론의 제사장직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하며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과 동일하게 대제사장으로서 일하셨는데 단지 아론과 차이가 있다면 아론은 자기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죄인이었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기에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셨던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하늘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하늘 보좌의 영광에 앉히셨다는 상징적인 말이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10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반차인 아론의 반차로 오시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더 이상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는 분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까? 그것은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가 복잡하거나 신비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고 또한 히브리서 기록자 자신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함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서의 내용을 읽는 자들이 지식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말씀을 깨달아 알도록 하실 수 없는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히 4:12).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될 수 있고 젖 먹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자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단한 식물’이란 앞에서 이제까지 히브리서 기록자가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제사장 직무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즉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계시하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어떤 자에게든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시간만 지나면 지식적으로 무엇인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리는 우리의 지식이 요구되거나 시간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고 또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복음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서 ‘말씀의 초보요 젖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은 초보요 젖먹이에 지나지 않지만 더 자라면 익숙해지고 또 장성해 진다는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라가야 한다!’, 혹은 ‘성장해야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젖먹이가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진리를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즉 구약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했던 약속의 성취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13절에서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의 말씀’이란 1장 초두에서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의로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의 말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주님과 합류된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만 붙들고 있는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으로 오셨지만 아론의 반차를 취하지 않으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는 말씀은 신앙적으로 성숙한 자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선악을 잘 분별할 줄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알게 된 자가 구약 성경만 붙들고 있는 자와 대비해서 장성한 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자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빈부의 격차가 있다거나 지식의 차이를 고려해서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쪽의 어떤 상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자신의 선택에 의해 주어질 뿐입니다. 오직 택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복음을 잘 설명한다고 듣는 자들이 받아들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은 전하는 자의 능력에 달린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논리적인 설명이나 말주변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들에 한에서 내려지는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십자가의 이 귀한 복음이 믿어지고 깨달아진다면 이는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일이지 우리 개인의 지혜가 아님을 알고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누르고 억압해서 성화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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