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3.하박국 2:5-20 하나님의 저주

불편한 진리 2014. 4. 9. 13:40

하박국 2:5-20
하나님의 저주
 


세상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시각과 성도가 보는 시각은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언젠가 심판하시고 끝내실 것입니다.
그렇다며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자면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언젠가 세상을 끝내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의 마지막에 있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답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바벨론은 술을 즐기면서 교만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의 욕심은 무덤과 같아서 죽음처럼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욕심이 마치 블랙홀 같아서 다른 나라들을 집어 삼키고 삼켜도 끝없이 삼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벨론 제국은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큰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으로 다섯 가지 화를 선포하십니다.
첫째로 물질적 탐욕이 있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6-8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라는 말에서 그들의 이기적인 탐심과 야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죄는 이기적인 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둘째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입니다(9-11절).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불의를 취하는 자라는 뜻으로 그들의 마음에 탐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탈취합니다.
셋째로 잔인하며 살인하는 자들입니다(12-14절).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합니다. 피로 성읍을 건설한다는 것은 사람을 착취한다는 뜻입니다.
넷째, 술 취하여 방탕한 자들입니다(15-17절).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것은 사람을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의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합니다.
다섯째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18-20절). “나무에게 깨라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것은 그들의 우상 숭배를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바벨론의 죄를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죄가 단순히 그들만의 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들추어내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악상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3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바벨론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벨론에 대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6-19)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바벨론은 세상을 말씀하는 대표상입니다. 모세 때에 세상을 상징하는 나라는 애굽이었지만 하박국 선지자 때에 세상을 상징하는 나라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상을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애굽과 바벨론의 공통적인 모습은 교만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유다에 대한 심판을 감행한 것이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한 줄 아는 교만으로 선 나라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이 다 이런 죄 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비할례자요 비언약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이 모든 시대에 걸쳐 바벨론이든 이스라엘(유다)이든 상관없이 이런 상태라고 들추어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할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바로 이방인이며 비언약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4절).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그런 처지에서 믿음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의인’이란 자신 안에 힘을 소지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에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란 율법을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지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율법을 가지고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보겠다는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에 의한 의인의 모습만 남은 것이 아니라 유다 전체가 죄의 도가니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란 율법을 행하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며 죄란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의를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롬 1:17).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기에 이제는 그리스도 그분만이 의가 되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도 이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기도했다고 해서 그 기도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한다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것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나 인간의 기대와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의 때에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요구와는 상관없는 것이었기에 복음은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바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죄를 폭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죽기를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의인이란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자입니다. 내 뜻을 포기하고 주님과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는 정신으로 사는 자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20절). 비록 성전이 파괴되어 이스라엘이 멸망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망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건재하십니다. 아니 그의 아들 십자가를 통해 더욱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을 통해 모든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1장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답답해하던 하박국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답변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악이 횡행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잠시 동안 하나님은 사탄의 활동을 용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결정적인 타격으로 모든 실권을 잃고 있습니다. 사탄에 의해 주장되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은 결국 무너집니다. 아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의 영역은 사탄의 머리를 치신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무너진 세상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을 향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모습 외에 다른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다른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끝내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 십자가만이 희망입니다. 아니 다른 차원의 희망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전도여야 합니다. 세상은 망할 나라로 보고 주님의 나라가 속히 이르도록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기도여야 합니다(마 6:10, 33)(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