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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34강
출애굽기 16:1-15
만나와 메추라기(1)
먹을 수 없는 마라의 쓴 물을 통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보여주면서 먹을 수 있는 진리의 물로 허락하시고 “치료하는 여호와”(출 15:26)로 말씀하심으로 써서 먹지 못하는 아랫물을 바꾸어 윗물로 제공하여 그들의 죄악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는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생존의 문제로 계속 불평하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1절). “엘림에서 떠나”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아무리 편안하게 쉴 수 있었던 곳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목적지는 엘림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좋은 쉼의 장소라고 느꼈을지라도 그곳을 떠나야 한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들은 물질의 축복을 받은 가정, 교회가 안식처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미래의 천국을 대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 땅은 삼 일 길로 말씀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광야의 과정이다.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에 도착할 때는 출애굽 후 한 달이 지난 “둘째 달 십오일”이었다. “둘째 달”은 애굽을 벗어난 첫째 달과 관련하여 둘째로 짝을 이룬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첫째 달의 물에 대한 갈증과 둘째 달의 양식 없음으로 드러나는 원망이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과 양식에 대한 계시를 하나로 말씀하고자 하신다.
“이르니”의 ‘보’는 광야에 들어가 광야의 상태가 됨을 나타낸다. 마라와 엘림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씀에 메말라 있는 광야(히, ‘미드바르’)의 상태이기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히, ‘다바르’)으로 먹이고 기르시는 현장을 걸어가야 한다(민수기 13:21, 20:1, 27:14, 33:36, 34:3, 4, 신명기 32:51, 여호수아 15:1, 3절에서도 우리 성경은 “신 광야”라고 번역하여 지리적으로 혼동이 되게 만들었는데 히브리어로는 ‘친 광야’이다 - 바른성경, 가톨릭성경은 “친 광야”, 현대인의 성경은 “진 광야”라고 번역하였다).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2-3절). 물의 문제가 해결되자 양식의 문제로 원망한다. 이 둘은 다른 두 종류가 아닌 하나로 계시를 주시는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의 문제이다. 여기서도 “원망하여”의 ‘룬’은 와우계속법 미완료로 썼다. 마라에서 있었던 원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3절)라고 하였는데 민수기 11:5에 의하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 11:5)이라고 말씀한다. 아마도 실제 애굽에서 이렇게 겪었다기보다 애굽이 더 좋았다는 것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생존을 위해 받아들였다.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은 열심을 내었던 율법주의적인 과거의 교회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절)라고 하였는데 광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그저 애굽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좋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 늘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내 쪽에서 원하는 구원에 하나님이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세상적으로 결코 나아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절). “그 때에”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 가운데 주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배고픔 가운데 처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죄성을 폭로하시면서 주시는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이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라는 말씀은 땅의 것과 대조되어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비”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비유하며(렘 5:24, 욜 2:23), 하늘에서 부어주신다는 표현으로 진리의 영이 말씀으로 주어지는 은혜를 표현한다(행 2:17-18, 33, 10:45, 딛 3:6).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의 날 안에서 하루의 말씀으로 거두게 될 것이라’라는 말이다(“거둘 것”의 ‘다바르’는 ‘일’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만나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리는 말씀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양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리고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고 하였는데 “율법”은 ‘토라’로 율법의 말씀이고, “준행하나”는 ‘얄라크’로 ‘가다, 오다, 걷다, 동행하다’라는 라는 뜻이다. 즉 ‘나의 말씀과 동행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시험으로 증명하시겠다’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죄성을 드러내신 시험과 같이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통해 빌립을 시험하심으로 하늘의 양식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땅의 양식으로만 계산하는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셨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5-7)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5절). “여섯째 날”의 ‘욤 하쉿시’는 창세기 1:31 이후 처음 언급되었는데 여섯 날은 안식이라는 일곱째 날이라는 한 날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섯째 날까지 거둔 매일 매일의 만나가 일곱째 날 곧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이루시는 안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매일 매일의 만나는 말씀으로 이루어질 안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의 말씀이 언약의 수 일곱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갑절이 되리라”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절을 거둔다는 것이 아니라 매일 거두는 양대로 거두는데 갑절이 된다는 말씀이다.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6-7절). “저녁”(6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여줌과 동시에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피가 뿌려지는 것으로 언약에 의한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아침”은 출애굽을 이루심으로 새롭게 살아나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8절).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라고 하니까 흔히들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빵과 고기를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함과 관계없이 말씀을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순히 빵과 고기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이처럼 만나와 메추라기 안에는 “여호와의 영광”(7, 10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날 언약의 성취가 계시되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원망은 단순히 모세와 아론에게 한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9-1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망함을 들으시고 그들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언약을 나타내신다.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고기와 떡을 먹는다면 그것은 죽음의 음식이 될 뿐이다. 그러기에 기도하였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응답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이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구름 속 여호와의 영광인 십자가를 보게 된다면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40년의 광야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10절)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교회를 보여준다.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11-12절).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12절)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된다(7, 8, 9절). ‘샤마’(듣다, 순종하다)로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순종을 이루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12절)라는 말씀은 저녁의 고기와 아침의 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시한다는 뜻이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해가 지기 전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 일 후 아침에 무교절에 생명의 떡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려주심의 은혜를 입은 자는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12절)라는 말씀대로 야훼 하나님과 하나 된다.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13-14절). “메추라기”(13절)는 민수기 11:20에 의하면 한 달 동안만 주셨고 만나는 40년 내내 내렸다(출 16:35, 수 5:12). 따라서 메추라기는 성막이 건축되기 전까지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출 19:1에 보면 한 달 후,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 산에 도착한다).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13절)라는 말씀은 진에 덮인 것이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으로 언제나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참고 신 30:14)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15절).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만 후’라는 말이다(이것을 우리 성경에 ‘만나’라고 표현하였다_출 16:31). 이것은 이스라엘이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던 것으로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라는 표현은 오직 언약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나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세상에 없는 것으로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2026011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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