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70. 요한계시록 18:4-8 기억하신지라

불편한 진리 2024. 3. 2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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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70

요한계시록 18:4-8

기억하신지라

 

1-3절에서 음녀는 큰 성 바벨론이며 이는 곧 귀신의 처소, 비진리로 장악된 감옥의 상태에 있기에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무너진 것으로 선포하였다. 세상의 모든 나라도 바벨론의 진노의 포도주에 동참하였는데 그것은 음행과 사치였다. 곧 우상 숭배와 비진리를 힘으로 삼아 이 땅에서 향락을 누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리의 성령께서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음으로 바벨론과 같은 ‘나’라는 왕국이 무너지고 생명을 누리게 되는 은혜가 주어진 자가 교회요 성도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음녀에게 동참하지 않도록 빼내시며 그녀의 멸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4절). “거기서”라고 하였는데 ‘그녀에게서’라는 말이다. 음녀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가”라는 표현도 ‘그녀’이다. 직역하면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녀의 죄들에 동참하지 않도록, 그리고 너희가 그녀의 재앙으로부터 받지 않도록 하라’라는 말이다. 이 말씀 역시 구약을 배경으로 한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고 보여주시기 위해 구약의 바벨론으로 먼저 보여주신 것이었다(참고 사 48:20, 52:11, 렘 50:8, 51:45).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렘 51:6)

 

유다가 공격당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는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멸망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나오라는 말씀도 이스라엘이 행하라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다.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거기서 나오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나오라!’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실 것이라는 언약이다. 그래서 음녀가 받는 재앙에서 함께 받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음녀 바벨론의 죄악 가운데서 왜 빼내시는지 그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5절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호티’(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5절). “사무쳤으며”의 헬라어 ‘콜라오’는 ‘결합하다, 부착하다, 달라붙다’라는 뜻이다. 즉 하늘에 딱 붙어 있다는 의미이다. 노아 홍수 심판 이후 인간들은 동방에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라고 하였다. 바벨론의 죄악이 하늘에 닿아 딱 붙었다고 하나님은 보신다. 예레미야 선지서에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렘 51:9)

 

죄가 하늘에 닿아 딱 붙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으면 안 될 상태라는 뜻이다. 죄가 무겁다거나 양이 많아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음녀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기에 철저히 심판하신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기억하신지라”라는 말의 헬라어 ‘므네모뉴오’는 ‘기억하다, 상기하다, 언급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언약 용어인 ‘자카르’의 역어이다. 즉 하나님께서 음녀의 악행을 기억하셨다기보다 자기 언약을 기억하셨기에 그 언약대로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으로, 또한 무거운 죄 혹은 가벼운 죄로 나누어서 본다. 그래서 죄의 양이 많다든지 혹은 적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법에 의해 다스리는 죄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혹은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음녀 바벨론의 “죄”(헬, ‘하마르티아’)는 땅의 왕들과 음행과 사치를 행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상 숭배와 비진리를 힘으로 삼아 누리고 즐기는 것이었다. 그녀의 본질이 귀신의 감옥이며 더러운 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권세이고 힘이다. 본질적으로 죄의 감옥이라는 권세에 갇혀 있는 상태에 있기에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것은 음녀와 하나 되어 있던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그래서 음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죄악상을 밝히신다.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6-7절). “갑절”이란 말의 ‘디플루스’는 ‘두 배, 이중’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단순히 ‘두 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디플루스)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라고 하셨을 때 두 배나 지옥 자식이 된다는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완전하고 확실한 심판을 강조한 표현이다. 행위대로 갚아 준다는 이 역시 구약에서 그대로 주어진 말씀이다.

 

그 주위에서 고함을 지르리로다 그가 항복하였고 그 요새는 무너졌고 그 성벽은 허물어졌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내리시는 보복이라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는도다(렘 50:15)

 

그래서 시편에도 보면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시 137:8)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바벨론에게 심판하는 복 있는 자란 바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서 바벨론에 대해 말씀한 모든 것은 단순히 역사 속의 바벨론 심판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의 권세 아래 매인 자들을 심판 하시고 그 가운데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결국 음녀의 행위대로 갚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시고 안 하시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 가운데서 나온 행위이기에 그 행위를 따라 하나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서 나온 모든 행위는 비진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녀의 행위란 성전 중심의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려고 하는 모든 종교 행위이다.

그것으로 “자기를 영화롭게” 한 것이며 “사치”라고 말씀하였다. 죄인이 영화롭게 되는 것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만 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드러내셨다(롬 1:17).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냐 자기를 부인하느냐 하는 것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이 곧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나를 부인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치”란 ‘스트레니아오’라는 말인데 ‘방탕하다, 사치스럽게 살다’라는 뜻으로 3절에서 표현한 ‘스트레노스’와 같은 의미이다. 비진리, 다른 복음을 즐기는 상태 그것을 방종, 음탕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라는 집단으로 모여서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큰 성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바벨론이 곧 음녀요 음녀는 짐승과 결탁되어 있고 짐승은 용, 즉 악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죄인의 상태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비진리, 즉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섬기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죄인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하게 영화롭게 하셨고 영광 돌리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음녀와 하나 된 자는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한다. 이사야서에 이렇게 말씀한다.

 

7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게베레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7-8)

 

아브라함 아내 “사래”(여주인)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여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을 때 그는 하갈에게 “여주인”(게베레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끌어 주시면서 “사라”(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바꾸어 주셨다(창 17:15). 그래서 음녀는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 없이 자신을 “왕”으로 여주인으로 내세우며 “과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신다. 음녀가 “과부가 아니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다른 남편, 비진리를 남편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라는 ‘하마르티아’는 진리에서 벗어나 진리가 아닌 것을 남편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8절).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동방으로 간 가인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동방의 시날 땅에서 바벨론으로 하나 되고자 하였다. 그 바벨론의 역사가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져 왔음을 생각할 때 “하루 동안”이란 표현은 분명히 대조된 표현으로 한 순간을 의미한다(10, 17, 19절). 이렇게 보았을 때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바벨론의 역사이며 그것은 곧 죄악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앙들”을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 “불에 살라지리니”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였는데 사망, 애통, 흉년, 불태워짐이 같은 의미이다. 결핍과 부족함, 고통 그것은 양식이 없는 기근과 같은 것으로 진리의 말씀이 없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갈급해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두신 것이 심판이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최종적인 심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라고 하였다(신 10:17, 시 46:10). 그 하나님께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죽는 십자가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십자가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만 진리임을 알기에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202403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70.1804-08 기억하신지라(202403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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