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67. 요한계시록 17:9-14 어린 양의 승리

불편한 진리 2024. 3. 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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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7

요한계시록 17:9-14

어린 양의 승리

 

음녀의 비밀은 비진리를 배경으로 짐승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이었고 짐승의 비밀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왔지만 결국에는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성도는 짐승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대적하는 교회가 음녀이고 짐승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멸망 받았고 또한 날마다 멸망될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시각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들, 즉 생명책이 되지 못한 자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이 짐승의 수하에 놀아나고 있고 사탄의 권세에 매여 다스림을 받고 있는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에 비진리로 힘을 자랑하는 짐승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의 활동이 어떠함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어린 양이 궁극적으로 이긴다는 것을 말씀한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9-10절). “지혜 있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지혜를 가진 마음’이다. 성경에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참고 눅 2:40, 7:35, 마 11:19, 고전 1:30, 2:7-8).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이 말씀은 13:18에서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고 있기에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자기 지혜로 알려고 하기 때문에 진리와는 상관없는 상태로 하나님을 모독하게 된다.

사람들이 본문에 대해 불필요하게 일곱 머리를 로마의 일곱 왕과 짜 맞추려고 시도하고 또 어떤 자들은 일곱 산 위에 있는 로마의 일곱 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역사상 나타났던 고대 제국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마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만 알 수 있다.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9절)이라 하였고 또한 “일곱 왕”(10절)이라 하였다. “산”과 “왕”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 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렘 51:25)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겔 35:3)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인 ‘바벨론’을 “산”으로 지칭하면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대적하는 에돔이 거하는 대표적인 산을 세일 산으로 표현하면서 그들을 대적하심으로 멸망 될 존재로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산이 멸망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슥 4:6-7)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보듯이 하나님의 일은 성령, 즉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언약의 대적자는 이 땅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큰 산”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힘과 능력이 있기에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산과 왕을 같은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왕 역시 힘과 권세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곱 산과 일곱 왕은 충만한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 “일곱”은 언약의 완성을 드러내는 수이다. 결국 “일곱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심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시내 산에 비견될만한 산으로 나타내어 완전하게 대적한다는 의미이다(12:3, 13:1). 그러니까 짐승이 자신을 신으로 드러내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자면 진리를 율법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이룰 수 있음을 자랑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진리가 없으면, 즉 진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일곱 귀신에 사로잡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신기한 기적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나타내는 것으로 십자가를 대적하고 모독한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10절)라고 한 말씀이다. 진리를 율법으로 가르치며 계명을 행위로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자면 “다섯”이라는 수는 율법을 상징한다(요 4:18). 율법으로 이미 망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하나는 있고”라는 말씀은 율법으로 망하는 것을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짐승은 여전히 또 다른 율법으로 다스리고자 하며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율법을 만들어 내어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짐승은 끊임없이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고 가르친다. 그래서 끊임 없이 새로운 율법을 요구하며 그 율법대로 살아서 영생을 취하려고 하는 죄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짐승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11절)라고 하였다. 즉 “여덟째”라는 수 ‘8’은 옛 창조를 새롭게 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마 28:1)이라고 하여 새 창조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즉 짐승이 자신을 “여덟째 왕”으로 나타내지만 그 속성은 “일곱 중에 속한 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비견되는 새로운 창조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짐승의 결국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한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12절). 다시 왕이 등장하는데 “열 뿔은 열 왕”이라고 하였다. 이미 13:1에서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라고 말씀하였다. “열”이라는 수의 ‘10’은 꽉 채워진 완전성을 나타낸다.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이 역시 ‘열 말씀’에 견줄만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열 뿔”이란 열 개의 나라를 꼽아서 헤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 권세,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표현이다.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라는 것은 세상에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왕국이 될 수 없기에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는다. “한동안”은 어떤 한 시점을 뜻한다. 즉 잠시 잠깐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열 왕은 짐승과 더불어 권세를 넘겨받아 다스리고자 하나 그것은 어떤 한 시점, 한 때이다.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13절). “한 뜻을 가지고”라는 표현은 ‘한 목적을 가지고’라는 말이다. 열 왕과 짐승 그들은 한 가지 목적,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의 모든 공동체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받은 권세와 능력이 짐승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짐승에게 돌린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가 영광과 찬송을 어린 양께 돌리는 것과 대조된다.

결국 짐승의 활동이란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해 주시는 은총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인간의 힘과 권세를 의지하고 자랑하는 세력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곧 율법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모든 존재가 세상의 왕이고 짐승이다. 성경, 교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한 성경이고 나를 위한 성령, 예수, 하나님이며 나를 살려주는 십자가에 불과하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4절). 어린 양과 싸우는 “그들”이란 바로 짐승의 세력에 속한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땅의 힘과 권세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한 가지 목적은 오직 어린 양을 대적하며 싸우는 것이다.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라는 말은 여러 주 가운데 한 주, 여러 많은 왕 가운데 한 분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이시고 왕이시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왕이 없다는 뜻이다. “진실한 자들”이란 ‘믿음이 된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 곧 예수님의 믿음이 된 자는 이미 이긴 자로서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 주로, 왕으로 고백하고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장차 있을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의 나라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땅의 현실, 즉 우리들의 현실을 하늘의 관점에서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음녀, 거짓 선지자, 짐승,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숨기고 다른 복음, 다른 예수로 언약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 그 사탄의 활동을 무산시키신 분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교회요 성도가 된 자로서 우리의 싸움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냐 아니냐 하는 싸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202403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67.1709-14 어린 양의 승리(202403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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