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72. 요한계시록 18:21-24 결코 다시

불편한 진리 2024. 4. 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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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72

요한계시록 18:21-24

결코 다시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기록의 마지막 부분으로 힘센 천사가 등장하여 바벨론 멸망의 참상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성도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씀한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21절). “한 힘센 천사”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어떤 일을 시행한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큰 맷돌 같은 돌”이란 소나 당나귀를 이용하여 곡식을 빻는 “연자 맷돌”을 지칭한다(마 18:6). “바다”란 이방인과 같은 세상을 상징한다.

“비참하게”라는 말의 ‘호르메마’는 ‘돌진, 돌격’이라는 뜻으로 ‘폭력적인 돌진’이라는 의미이다. 폭력이 가해진 파괴적 방식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바른성경에서는 “이같이 난폭하게 큰 성읍 바빌론이 던져질 것이니,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환상은 구약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다.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렘 51:62-64)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에는 본문의 내용과는 달리 바벨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책을 하수에 던지는 것은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취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은 이러한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된 것인가를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맷돌이 암시하는 바를 성경에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삿 16:21)

 

13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5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사 3:13-15)

 

심판 가운데 압제하고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은 율법적 행위였다(마 23:4). 유다를 멸망시킨 이방인 바벨론을 요한 사도는 음녀라고 하였는데 음녀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큰 맷돌로 상징된 음녀 바벨론을 바다에 던진다는 표현은 성전 중심의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을 세상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2:9, 3:9)라고 말씀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멸망으로 인해 율법적 행위를 하여 쌓고자 한 죄인의 의가 철저하게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비진리이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가 말씀을 강조하고 해석하여 말씀 중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종교적 행위만 무한 반복할 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진리, 다른 복음을 품고 다른 예수를 좇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수많은 성경공부, 제자훈련을 하지만 죄인의 의를 부추기는 비진리를 확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율법을 문자로 해석하여 나온 더럽고 악한 말, 다른 복음이라는 비진리는 하나님의 능력, 은혜에 의해 이미 세상에 던져 넣어버린 상태이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내가 세상을 그렇게 버린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심판으로 말씀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22절). “거문고 타는 자”는 헬라어로 ‘키다로도스’인데 ‘하프를 타는 자’라는 뜻이다. ‘키다라’라는 ‘하프’는 구약에서는 우리 성경에 ‘수금’으로 번역된 ‘킨노르’를 지칭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풍류하는 자”란 말의 ‘무시코스’는 ‘예술의 기량이 있는’이라는 뜻이고 “퉁소”의 헬라어 ‘아울레테스’는 ‘피리’를 뜻한다.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이란 하프를 타는 자들과 같이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단순히 음악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자기 즐거움과 만족이다. 그래서 성경에 수금을 타고 퉁소를 잡은 자로 가장 처음에 언급된 자가 가인의 후예 “유발”이다(창 4:21). 진리의 말씀을 떠난 자들이 문화에 심취하여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소리가 진리를 가장하고 모방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가 없기에 음악으로 기쁨과 즐거운 척하였는데 그것마저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비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의미는 세공업자에 대한 언급에서 더 분명하다.

“세공업자”의 ‘테크니테스’는 ‘기술공, 장인, 설계사’를 뜻하는데 ‘기술, 기능, 직업’이라는 뜻의 ‘테크네’에서 온 단어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테크니테스)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즉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성이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에 이끌려 온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하늘의 도성이 있기에 그 계획을 따라간다면 하늘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공업자”이란 율법 해석을 기술적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하늘의 생명이라고 나타내었지만 실상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는 율법사와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율법을 해석하여 장사하는 기술로 성전을 장악하는 비진리의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이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 25:9-11)

 

비록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이지만 70년이 차면 바벨론은 폐허가 되고 유다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는 맷돌 소리가 끊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바벨론 왕을 섬길 동안은 진리의 말씀을 누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왜냐하면)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23절). “등불 빛”은 성소의 등잔대를 반영한 표현이다. 성소의 등잔대는 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요한 사도는 본 서신의 서두에서 등잔대 가운데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였던 것이다(1:12-13).

그런데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성전의 등잔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율법적 행위로 성전을 장악하여 자기 의로 하늘의 생명을 취하려고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1-2)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성전으로 삼고 행하는 자신의 모든 종교적 행위가 무너지는 심판을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이고 그 성전과 하나되는 것이 구원이다(고전 3:16, 엡 2:20-22). 따라서 그 성전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예레미야 25:10, 16:9의 말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그 중에서도 유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있다.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렘 7:34)

 

한마디로 결혼하는 일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신부 된 교회요 성도는 이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음녀 바벨론과 같은 ‘나’, ‘우리’라는 존재가 날마다 무너짐으로 완성된다. “(왜냐하면)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라는 말씀은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생활을 한 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들 위에 더 높은 존재로 군림하고 장악하였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심판의 이유를 밝혀준다. “복술”이란 ‘파르마케이아’로 ‘마술, 마법’이라는 뜻이다. “미혹되었도다”라는 표현의 헬라어 ‘플라나오’는 ‘방황하다, 헤매다, 길을 잃게 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의 말씀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라는 것이었으나 행위로 자기 의를 자랑하였다. 이것은 유대인들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이 그 죄성에 함께 끌려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오늘날 교회들 역시 이렇게 복음을 율법의 문자로 거래하는 장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것을 한국교회의 모습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악상이다.

그러나 24절에서 이렇게 18장의 말씀을 맺는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24절). “그 성 중”이란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문자적인 율법으로 성전을 장악한 종교적 행위가 성행하는 자리에서의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지금 음녀 바벨론이 무너진 상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 발견된다.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21절), “결코 다시 … 들리지 아니하고, 결코 다시 … 보이지 아니하고, 결코 다시 들리지 아니하고”(22절), “결코 다시 … 비치지 아니하고, 결코 다시 … 들리지 아니하리로다”(23절)라는 여섯 번의 ‘우 메 … 에티’는 ‘결코 다시는 … 아니다’라는 뜻으로 완벽하고 철저한 멸망을 말씀한다. 수동태로 표현되어 성도에게는 진리로 찾아오신 성령께서 음녀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결코 다시 발견될 수 없고 들리지 않는 나라로 날마다 무너뜨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자기 백성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의 성취이다(202404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72.1821-24 결코 다시(202404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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