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68. 요한계시록 17:15-18 말씀이 응하기까지

불편한 진리 2024. 3. 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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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8

요한계시록 17:15-18

말씀이 응하기까지

 

1절에서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하였는데 그 음녀의 실상을 7절 이하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짐승과 놀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짐승의 비밀은 땅의 권세로 어린 양을 대적하다가 반드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1절에서 말씀한 것에 대한 답으로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15-18절 말씀은 13-14절 앞에 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뒤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의 내용이 아니라 13-14절에서 어린 양이 승리한 것에 대한 이유를 15절 이하에서 밝혀주는 것이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15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다.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이란 같은 의미를 반복해서 표현한 것이다. 죄인들이 동방에 자리를 잡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고 흩으셨던 바벨이다(창 11:7-9). 그래서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나뉘어진 존재이다(창 10:5, 20, 31). 그들의 한 가지 언어는 비진리였고, 그 한 가지 언어로 뭉치는 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음녀는 여전히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 즉 비진리를 배경으로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땅적 존재들이 궁창 아래의 물이고, 진리가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나 그것은 도리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하는 것이다(빌 3:18).

구석구석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행하는 세상의 광범위함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가 총체적임을 4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물 위에 앉아 있는 음녀가 세상에 얼마만큼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18절에서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18절)라고 말씀한다. 음녀의 다스림과 상관이 없는 자는 없기에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9-18)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하였고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라고 말씀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비진리의 무리 그들이 곧 ‘우리’이고 ‘나’로서 음녀이고 짐승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관점이고 성경의 선언이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6절). 비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세상의 모든 나라는 “열 뿔”이라는 힘과 능력의 완전성을 나타내면서 “짐승”과 함께하여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라고 하였다. 즉 짐승과 음녀의 관계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망하게”라는 말의 ‘에레모오’는 ‘광야’라는 뜻을 지닌 ‘에레모스’에서 온 단어로 ‘황폐하게 하다, 전멸시키다, 유린하다’라는 뜻이다. “벌거벗게 하고”라는 말의 헬라어 ‘귐노스’는 ‘입을 것이 없어 수치가 완전히 폭로된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간음과 관련된 표현으로 짐승과 음녀는 서로 간음하는 상태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살을 먹고”라는 말은 ‘그녀의 살을 먹고’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것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하셨고, 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하신 그리스도에 비견되는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불로 아주 사르리라”라고 하였는데 “아주”라는 표현은 번역하면서 임의적으로 넣은 것이고 ‘불로 태운다’라는 말인데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속죄의 날에 희생 동물의 육체를 영문 밖에서 불사르는 것에 대해 사용된 표현이다(레 16:27, 히 13:11). 에스겔 23:11-35 말씀을 배경으로 하였다.

북쪽 이스라엘의 도시인 사마리아는 언니 “오홀라”(장막을 소유한 여자), 남쪽 유다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동생으로서 “오홀리바”(장막이 그녀 가운데 있다)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겔 23:4). 그런데 이 두 자매는 음녀로서 심판을 받는다(우리 성경에 “형”이라고 번역한 말 ‘가돌’은 ‘위대한, 큰’이라는 뜻이고, “아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호트’는 ‘누이, 자매’라는 뜻으로 여성단수이다). 오홀라는 젊었을 때 애굽과 행음하였고(겔 23:8), 나이 들어서는 앗수르와 행음하였는데(겔 23:5-7) 하나님은 그들을 앗수르에 넘겨 멸망시키는 심판을 하신다.

그런데 남유다 오홀리바는 북이스라엘보다 음욕을 더하여 간음함이 더 심하였다고 언급한다(겔 23:11-12). 오홀리바도 앗수르와 연애하였으나 바벨론에 의해 더럽힘을 당하고 멸망을 당한다(겔 23:23). 이 과정에서 바벨론은 음녀 오홀리바의 옷을 벗기고(겔 23:26, 29), 육체를 먹으며, 불살라 태워버린다(겔 23:25). 바벨론이 유다에게 하듯이 열 뿔과 짐승이 함께 음녀에 대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비진리로 율법적인 종교적 행위를 그렇게 유린한다는 의미이다.

음녀는 짐승의 힘과 세력을 의지하여 비진리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짐승에 의해서 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힘을 의지하는 자가 힘에 의해서 망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순종을 몰랐고, 아들이 십자가를 지기 원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몰랐기에 베드로는 검을 들고 예수님을 잡고자 한 자들 앞에서 설쳐댔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라고 하셨다. 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다른 힘에 의해 제압당할 수밖에 없다. 힘을 의지하는 자는 힘에 의해 망하는 것이다.

세상은 바로 이런 관계로 지속되고 있다. 이 땅에서 서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작해야 자기 유익과 자기 과시를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내게 필요한 것이 얻어지면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관계이다. 그런 자들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진리의 영이 찾아오시니 땅에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사는 자로 바뀌었다. 따라서 성도는 인간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살아나 생명을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짐승이 음녀를 왜 미워하고 거부하면서 망하게 하는지 그 이유가 본문에 정확하게 나타나있지 않는데 그것을 17절에서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17절)라고 말씀한다.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가르’(왜냐하면)라는 단어가 있다. 여기서도 “한 뜻”이란 ‘한 목적’, 즉 같은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라고 하였는데 “주사”는 ‘디도미’라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마음을 넘겨주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목적, 같은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의 나라를 짐승에게 넘겨주어 한 가지 목적을 이루게 하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이다. “응하기까지”의 헬라어 ‘텔레오’는 ‘끝내다, 완성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기까지 나라들을 짐승에게 넘겨주셨고 율법적 행위로 음녀를 유린하도록 잠시 권한을 넘겨주셨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하였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4-32)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심으로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니 인간들은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비진리를 좇아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진리인 것처럼 나타내며 서로가 자기 것이 진리라고 우기는 모습들로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 심판 아래 있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에서 말씀이 성취되어 종말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심판 아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는 생명을 누리는 은혜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의미 있는 것은 오직 하늘에서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뜻이다(요 17:12, 18:9, 19:28 등).

하나님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다. 음녀가 일순간 힘과 권력을 마음대로 쓰는 것 같고,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짐승이 나라들을 다스리며 비진리로 미혹하는 음녀의 활동이 가능하였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심판하실 때까지 허락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도 말씀이 임한다면 겉 사람은 죽고 속 사람이 진리로 거듭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것 자체는 의미가 없다. 아니 우리가 시간 속에서 여전히 역사를 살고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십자가로 이미 종결하신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을 산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에 의미가 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니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자!”라는 생각으로 오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는 짐승의 마음, 음녀의 사고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음녀, 짐승, 용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이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누리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1-4)

 

(202403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68.1715-18 말씀이 응하기까지(202403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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