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66. 요한계시록 17:6-8 짐승의 비밀

불편한 진리 2024. 2. 25.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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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6

 

요한계시록 17:6-8

짐승의 비밀

 

성경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을 겉으로만 읽으면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로 영생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져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본질이다.

지난 강론의 말씀에 근거하여 보자면 세상에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음녀의 비밀에 속한 자와 하나님의 비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에 속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에 속한 자는 하나님 왕국의 비밀을 아는 자로 하나님의 집이 된 자이다. 오직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그 비밀을 품게 된 자가 되는 것이기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 본질이라면 반대로 이 땅, 곧 세상은 허상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실체에 대해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의 실체는 음녀였다. 음녀는 짐승과 하나 되어 비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나타내면서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경이 음녀라고 밝혀서 그렇지 그냥 여자라고 생각해 보면 어떤가?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고 손에는 금잔을 든 화려하고 부유한 상태로 보이는 모습은 사람들이 흠모하고 추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음녀는 가증한 것,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상태로 짐승과 하나 되어 즐기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여자는 구약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하면서 진리를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나타내는 교회들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교회에서 전하는 다른 복음의 내용 곧 고지론, 축복론, 신유 은사 등을 추구하는 잘못된 믿음, 다른 예수를 따르는 그것이 간음이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강론의 편의상 1-5절과 6-8절을 나누어서 보지만 사실 연결된 말씀으로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6절). “내가 보매”라는 표현은 ‘그리고 내가 보았다’라는 말인데 장면을 전환하여 여자와 하나 된 짐승에게로 관심을 두고 확실하게 본 계시를 전한다는 의미이다(1:2).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란 성도들의 피와 증인들의 피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2절에서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라는 말씀을 재해석하는 내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성도들의 피’라는 의미이다. 단순히 성도라는 이름만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증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함으로 죽임을 당한 자의 피에 음녀가 취하였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피를 마신다는 것은 살육을 의미한다.

 

그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렘 46:10)

 

음녀가 비진리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지난 강론에서 말씀드렸는데 그 대적의 실제적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음녀가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도록 하는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성도들이다. 땅적 존재들에게 비진리에 취하도록 하여 성도들이 그것을 진리로 생각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3-24)

 

또한 하나님은 배교하고 우상 숭배하도록 비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어디에서 있는가를 바울 사도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도록 하셨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1-4)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라는 말씀은 성전을 중심으로 율법적 행위를 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비유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모든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한국 교회는 그런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겨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구약의 십계명을 변할 수 없는 말씀이라고 하여 우리가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에 더하여 신약을 새로운 율법으로 행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진리의 영이 말씀으로 사로잡아 이끄시기에 결코 음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성도들은 죽임을 당할지언정 음녀의 미혹에 빠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산상수훈을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향해 가셨고 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는 죽음으로 완성하셨기에 간음과 상관없는 상태로 만드셨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라고 썼다. 여기서 “놀랍게 여기고 놀랍게 여기니”라는 말의 ‘다우마조, 다우마’는 ‘경이롭게 여기다, 경탄하다, 신비로운 것으로 여기다’라는 뜻이다. 여자는 짐승과 하나 되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교회요 성도는 결코 음녀와 하나 될 수 없도록 주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3-4절에서 “붉은빛 짐승”이라든지 여자가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었다는 것도 성도를 죽이고 흘린 피와 관련되었다.

외형적으로는 자줏빛과 붉은빛으로 치장하였고, 온갖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금잔을 들고 있어서 귀족이요 왕족 같은 통치자로 보이지만 실제는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죽인 피의 흔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음녀 바벨론은 성도들의 피로 옷 입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좋다는 것으로 치장을 하였지만 음행의 더러운 것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가증한 것들의 어머니이다.

요한 사도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 사실을 보게 되었을 때 성도와 세상의 관계가 보여주는 현실성에 놀라고 또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죽임을 당하고 음녀는 비진리 위에 승리자인 듯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는 이 음녀에게 세상에서 보화라고 하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탈취당하였다. 이것이 성도와 세상과의 관계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된 자는 세상에 기대할 것이 없다.

이제 놀라는 요한 사도에게 천사가 음녀와 하나 된 짐승의 비밀을 계시한다.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7-8절).

8절에서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하였는데 알기 쉽게 직역하면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지만 지금 없다. 그리고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게 되어 있지만 멸망으로 들어간다’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에 “장차”라고 번역된 말의 헬라어 ‘멜레이’(원형 : ‘멜로’)는 ‘곧 ~하려고 한다’라는 뜻이다. 즉 미래적 사건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되어진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짐승을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자”라고 하였다. 13장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하여 이미 언급한 것을 보았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와 보좌와 능력을 부여받았다. 땅적 존재들을 권세와 영광과 힘으로 미혹을 하는 존재이다. 결국 바다에서 올라왔든 땅에서 올라왔든 그것의 출처는 하나다. 무저갱에서 올라왔다. 그래서 이미 이렇게 밝혔었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계 9:11)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 11:7-8)

 

음녀, 짐승, 거짓 선지자, 사탄은 서로 다른 존재로 다른 활동을 하는 자가 아니라 같은 출처 “무저갱”이라고 밝혀줌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으로 통칭하여 나타낸다. “무저갱”이라는 ‘아뷔쏘스’는 ‘밑바닥이 없는, 깊이를 잴 수 없는’이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깊음의 물, 깊은 바다, 땅 깊은 곳, 심연’의 의미인 히브리어 ‘테홈’을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다(창 1:2, 사 63:13, 시 42:7, 71:20, 겔 31:4). 한마디로 죽음의 자리이다(시 63:9, 71:20).

따라서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라는 표현은 11:7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무저갱에서 올라왔기에 무저갱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에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7b-18)라고 하셨고,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2:8)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창세 이후로”라는 말씀은 13:8에서와 같이 ‘창세 전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라는 말씀은 묵시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짐승이 멸망되는 것이나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하지만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해져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존재는 짐승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땅적 존재들은 짐승을 모르기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음녀와 하나 되어 즐기다가 멸망 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짐승의 비밀이다. 성경은 이 실체를 밝혀주고 있기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이끌려 예수 그리스도만 증언하는 말씀 안에 있다면 세상은 이미 멸망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적하는 상태라는 것이고, 반대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짐승은 음녀와 하나 되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피에 취하지만 교회요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은혜에 취한 자이다(202402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66.1706-08 짐승의 비밀(202402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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