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십계명(열 말씀) & 언약

언약의 열 말씀 강론 12_출애굽기 20:17 탐심

불편한 진리 2023. 7. 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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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열 말씀 강론 12

출애굽기 20:17

탐심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이 말씀도 계명으로 보게 되면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 수준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남의 것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이다. 이런 이해의 바탕 위에서 대부분 탐심의 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그 비결이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잠언 28:16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탐욕을 미워하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한다. 진리를 왜곡하는 이런 설교들이 인터넷에 즐비하다.

그런데 탐심이란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기에 이런 비결들을 제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탐심의 죄를 극복할 수 있는가? 죄의 권세 아래 매인 인간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죄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인가? 스스로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실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열 말씀에서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바울 사도가 율법에 대해 언급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7-9)

 

바울 사도는 율법이 아니면 탐심을 알 수 없었다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율법을 열심히 준행하는 것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탐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주심으로 죄를 죄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롬 5:13).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인간에게 내재 된 죄의 문제를 들추어내심으로 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죄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계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결코 지켜낼 수 없는 죽은 존재임을 철저히 폭로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절)라는 말씀의 문맥 속에서 전체 열 말씀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으로 주어진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웃이란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웃의 집이란 ‘그리스도의 집, 하나님의 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서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은 집을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인 하나님의 집, 영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탐심이다. 거짓된 증인이 거짓 증언으로 하나님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자 하는 것, 은혜가 아닌 자기 열심으로 그 집이 되려고 하는 것이 탐심이다. 결국 죄인이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것 자체가 탐내는 것이고 이러한 탐심이 바로 우상숭배이다(골 3: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도 우리에게 탐심을 억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탐내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가 이 언약 안에 있다면 우리가 바로 자비를 베푸시는 유일한 이웃이 거하는 그 집이 되었기 때문에 탐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새 언약을 말씀하셨고(렘 31:31-34, 겔 36:26-28),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유월절 식사를 통해 이렇게 보여 주셨다.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십자가 죽음으로 새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은 율법의 완성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통해 이렇게 밝히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율법을 어떻게 완전하게 성취하셨다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한 마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마 22:37-40).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즉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주시기 위해 찾아오심으로 이루셨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의 확증이다(롬 5:8).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하였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결국 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이웃이 되어주심으로 이루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죽음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심으로 그 영을 넘겨주심으로 진리의 영, 성령 안에서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기에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 은혜로 자신의 몸 된 교회에 부어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15-24)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을 흔히 말하듯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자고 말한다. 솔직하게 진심으로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억지로라도 지킨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자들이 다 지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우리 안에 외부에서 주어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여기서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였는데 “마침”의 헬라어 ‘텔로스’는 ‘종결, 목표, 목적’이라는 뜻이다. 즉 율법의 목표요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선언하였다. 모든 인간은 철저히 자기 행위로 하늘의 의를 쟁취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하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복음이다(롬 1: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복음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며 혹시 들어도 거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죄인이다.

우리가 아무 행한 것이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이루신 율법의 완성을 성령께서 나에게 적용되도록 사랑을 이루신 것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으며(롬 8:1-2), 언약의 말씀, 그 진리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요 8:32). 결국 열 말씀은 열 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진리를 보여 주신 복음이다(202307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언약의 열 말씀 강론 12_출2017 탐심(202307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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