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십계명(열 말씀) & 언약

언약의 열 말씀 강론 10_출애굽기 20:15 도둑질

불편한 진리 2023. 6. 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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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열 말씀 강론 10

출애굽기 20:15

도둑질

 

‘도둑질’의 일반적인 뜻은 ‘남의 물건을 주인의 허락 없이 훔치는 것이나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에서는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도 언약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재산 보호와 관련된 계명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는 사유 재산과 소유를 소중히 여기는 종교라고 가르친다. 은밀하게, 공공연히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거나 혹은 사기 행위에 의한 착복까지 금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 계명을 해석한다.

그러면서 도둑질에는 큰 도둑질이 있고 작은 도둑질이 있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말라기 3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큰 도둑질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 8계명에 대해 공개된 많은 설교들을 보면 대부분이 십일조 혹은 물질을 맡은 청지기에 대한 교훈을 주는 계명으로 해석하고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계명을 잘 지켜야 할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하나님께서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정말 헌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그런 교훈에 불과한 것일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라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또한 사회가 갈수록 계속 복잡해지고 다양한 현상들이 발생하면서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도둑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작권’이나 ‘특허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저작권이나 특허권에 대한 도둑질은 어떻게 이해하고 지켜야 하는가? 새롭게 대두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율법의 조항들을 더 만들어야 하는가?

또한 이 계명이 단순히 물건에 대한 것에만 한정되어 있는가? 출애굽기 22:1 이하에 보면 도둑질 한 것이 있다면 다섯 배 혹은 네 배로 반드시 배상하라고 되어 있고 사람을 도둑질 한 자에 대해서는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라고 하였고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7)라고 하여 그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도 교회가 이렇게 실천하고 있는가?

실로 오늘날 십계명은 그야말로 말에 그치는 계명에 불과하다. 계명으로 이해하고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에 많은 교인이 이 계명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렇게 계명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좋게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 생활에 대한 뿌듯함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 교회들이 자기 의가 충만해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단순히 계명이 아니라 열 말씀으로써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을 늘 확인하면서 이제까지 말씀을 나누었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이 여덟 번째 계명도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주신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약의 말씀을 열 말씀으로 주셨다. 그렇다면 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완성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완성하시는 언약의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말씀 속에 담아두신 본질적인 뜻은 무엇인가? “도둑질”이란 히브리어 ‘가나프’는 ‘훔치다, 도둑질하다’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동의를 받지 않고 혹은 몰래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는 노정 시내 산에서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와 미리암이 온 백성들과 더불어 찬양한 것에 잘 드러나 있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3-17)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인도하시는 곳은 현실적으로는 가나안 땅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의 거룩한 처소”이다(출 15:13). 그러면 주의 거룩한 처소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이스라엘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실 것인데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의 처소”로 삼으시는 것이고 그것이 “주님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라고 선포한다(출 15: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소’ 즉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열 말씀을 통해서도 보여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동일하게 드러났다. 소위 말하는 다섯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씀 속에도 담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라는 의미였고 어머니는 하나님의 진리 곧 말씀을 의미하였다.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하나님의 집과 말씀이 영화롭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의 집이 되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런 목적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막, 성전을 건립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지기를 거부하였다. 도리어 하나님의 집을 도구로 이용하여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악이고 오늘날 우리의 죄악이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11)

 

역대하 35:18에 보면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이 제사를 하러 가는 성전 문에 서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도둑의 소굴로 보신다고 선포하였다.

“도둑의 소굴”이라는 말에서 ‘도둑’(히, ‘파리츠’)이라는 말은 ‘파괴하다, 약속을 깨다, 관계가 무너지다’라는 ‘파라츠’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께서 도둑의 소굴로 보신다는 것은 거기서 제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언약을 파괴하고 깨는 행위라고 보신다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을 약속이 깨어진 집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인용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예수님께서 헤롯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성전을 개혁하고 정화하시는 차원이 아니다.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신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성전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즉 하나님의 집은 언약을 파괴하는 집이 될 수 없고 기도라고 일컫는 집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기도하는 집”이라고 의역을 하였는데 ‘기도라는 집, 기도라 일컫는 집’이라 말이다. 즉 하나님의 집 자체가 기도라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기도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고백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라는 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집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소원을 가지고 율법적인 자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다.

결국 도둑질이란 하나님의 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을 잘 지키는 나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의 집을 나의 집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도둑질이다. 하나님의 영생을 도둑질하여 내 생명으로 취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도둑질이고 강도짓이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도둑질하는 존재로 태어나 하나님의 집을 내집으로 만들려는 도둑질을 끊지 못하는 존재로 살기에 이 땅에 건물로 세워진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도둑질하는 자로 태어났고 강도로 산다. 그런데 우리의 도둑질, 강도짓이 언제 끝나는가? 언약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성령께서 인정되게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도둑질, 강도짓은 끝이 난다. 그것이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상태이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될 때 우리의 도둑질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자신들의 도둑질이 폭로되니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예수님을 도둑이요 강로로 몰았다. 오늘날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강도로 보고 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막 14:48)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 15:2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죄인들이 강도로 몰았던 예수님 그분이 친히 성전보다 큰 자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성전,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셨다. 더 이상 자기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의 집을 도둑질하려는 상태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도둑질하지 않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202306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언약의 열 말씀 강론 10_출2015 도둑질(202306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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