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론 24
창세기 4:14-26
다른 씨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인의 죄를 말할 때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말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아우아벨을 죽인 행위 자체만을 가지고 성경은 죄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은 처음 것의 기름으로 구분된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가인은 땅의 열매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 본질적인 죄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거부한 죄가 아벨을 죽인 행위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죄란 땅의 것을 자기 종교 행위로 삼아 하나님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마음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4-15절).
여기서 “표”란 단순히 가인이 누구를 만나든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표가 아니라 언약의 ‘표, 표징, 상징, 표적’이라는 의미로 가인과 같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이다. 그 언약의 표가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였고(출 12:13-14),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했던 언약의 표가 ‘임마누엘’이었다(사 7:14). 즉 임마누엘로 오시는 하나님은 어린 양으로 피 흘리는 방식으로 언약을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결국 가인의 표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우리 성경에는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라고 번역되었는데 여기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란 히브리어로 ‘마차’인데 ‘찾다, 이루다, 얻다’라는 뜻인데 6:8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할 때 “입었더라”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차’이다. 즉 모든 만나는 것을 통해 죽음을 면하는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가인이 만나야 할 자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에서 제외되게 하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라는 말씀은 땅을 섬기는 가인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을 은혜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16절). 12절에 보면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오늘 본문에서 가인이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는 말씀과 맞지 않다. 유리하지 않고 놋 땅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못했다는 뜻인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12절에서 땅에서 유리하는(히, ‘누드’) 자가 된다는 것은 땅에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라는 것을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놋 땅에 거주하였다는 것을 단순히 놋이라는 땅에 정착하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
“떠나서”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야차’라는 말은 ‘분리, 죽음, 낙태’라는 뜻으로 가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분리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 있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그곳을 “에덴 동쪽”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여호와 앞을 떠났다는 것을 에덴 동쪽이라고 표현함으로 에덴과는 멀어져 있는 건너편, 반대편을 의미하고 곧 대적자라는 뜻이다.
“놋”이란 히브리어 ‘노드’인데 ‘유리, 방황’이라는 말이다. 또한 “거주하더니”라는 말의 ‘야사브’는 ‘자리를 잡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는 말은 놋이라는 지명의 땅에 거주하였다는 의미라기보다 ‘유리하는 존재로 자리를 잡았다’라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땅을 섬기는 존재로 땅에 자리를 잡고 유리하며 방황하는 상태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할 때 깨끗함을 얻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 가운데서 불쌍히 여기심을 입는 것이다.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0-41)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17절). “동침하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이다. 아내와 동침하였다는 것은 ‘여자를 알았다’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가인은 여자를 아는 것으로 교회가 되고자 하는 죄인이라는 뜻이다. “성을 쌓고”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왕국을 세우는 존재라는 것이고,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을 짓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성을 아들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그렇게 잉태하여 얻은 것이 “에녹”이다. 히브리어로 ‘하노크’는 ‘전수자’라는 뜻인데 ‘바치다, 드리다, 완성하다’라는 ‘하나크’에서 유래된 말이다.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하나크)을 행하였는데(왕상 8:63)
여기서 “봉헌식”이라고 번역된 말이 ‘하나크’이다(역대하 7:5에서는 낙성식으로 번역하였다). 가인이 아들의 이름으로 그 성 이름을 에녹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왕국, 성전을 자기 자신에게 드려 완성하였다는 뜻이다. 가인이 성을 쌓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드러내는 죄악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그곳이 에덴 동쪽이기에 내가 가인과 같은 ‘소유’이다. 끝없이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가지고자 하는 죄인이고 대적자이며 원수이다(살후 2:3-4, 롬 5:10).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제거하고 생명 나무의 길을 열어 놓으실 때 말이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18-21)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18절). 여기에 소개 된 고대의 이름들을 언어학에 대한 연구가 더 깊어지고 발달하면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그 뜻을 정확하게 다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랏”(히, ‘이라드’)은 ‘도피자, 도시’라는 뜻이고, “므후야엘”(히, ‘메후야엘’)은 ‘하나님께서 치신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 “므드사엘”(히, ‘메투샤엘’)은 ‘하나님의 사람’, “라멕”(히, ‘레메크’)은 ‘강한 자, 왕’이라는 뜻이다. 인간들이 죄 가운데서 좌충우돌하며 하나님을 찾아 나가려고 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결국은 “라멕”이라는 이름 속에 그 의미들을 다 담고 있다. 즉 인간은 강한 자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 본문에서 잘 보여준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29-22절).
“조상이 되었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브’인데 ‘아버지’라는 뜻이다.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자기 소유물을 장막에 가진 자의 아버지’이다. “아우”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형제’이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갈대 피리)를 잡는 아버지이다. “두발가인”은 날카로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아버지였고, “나아마”는 ‘즐거운, 유쾌한’이라는 뜻이다.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땅의 것, 세상 것에 대해 아버지가 되고 싶은 죄상을 그대로 다 드러내 준다. 그것에만 즐거움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에 기인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23-24절). 우리 성경에 라멕이 사람을 죽였고 또 소년을 죽였다고 표현하고 있어서 마치 여러 사람을 죽인 것처럼 번역되었으나 사람을 죽였는데 그가 어린아이였다는 뜻이다. 라멕은 강한 자로 또한 왕으로 땅의 것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고자 오해한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준다. 그래서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죽음을 면하는 가인의 칠 배를 칠십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위한 스스로의 언약을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단순히 살인죄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라멕이 사람을 죽이는 이것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성경은 폭로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5-26절). “다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오드’(계속, 연속, 여전히, 그 외에)인데 ‘우드’(증언하다, 증거를 삼다)에서 유대한 단어이다. “셋”(히 ‘셰트’)이란 ‘놓다, 두다’라는 뜻인데 ‘쉬트’(관심을 가지다, 정렬되다, 세우다, 짓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족보를 언급한 것에 놓여 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가인에 의해 아벨이 살해 당함으로 끊어진 족보가 ‘셋’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두신 것에 의해서이다. “다른”이란 히브리어로 ‘아헤르’인데 ‘다음의, 뒤에 오는’이라는 뜻이다(참고 욜 1:3 등). 그 방향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내 언약은 내가 내(아헤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21)
그래서 “다른 씨”란 죄인들이 하나님을 계속 소유하고자 하나 하나님은 아들 낳음을 통해 그 후손으로 계속 증거를 삼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언약을 세우고자 하신다. 셋이 아들을 낳아 “에노스”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에노스”는(히, ‘에노쉬’) ‘병들다, 악한, 슬픈, 비참한’이라는 뜻을 지닌 ‘아나쉬’에서 온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말씀은 죄인은 비참하고 병들어 가장 연약한 가운데서 사람의 이름에 관심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관심으로 돌려졌다. 이것이 “다른 씨”(후손)를 통해 언약을 통해 진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202301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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