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론 22
창세기 4:1-7
가인과 아벨
창세기 3:22 이하의 본문을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4장을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비참해졌는가 하는 것으로 읽기 쉽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을 가지고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마태복음 5:22을 인용하면서 우리도 형제를 미워하거나 죽이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 되고 죄를 지으면 이렇게 비참하게 된다는 교훈을 주시는 본문으로 이해한다.
또한 가인과 아벨의 예배로 구분하여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예배했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드린 예배였는데 아벨의 제사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피 흘리심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추측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예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가 되어야 하는가를 잘 교훈해 주는 설교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어떤 예배를 하고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1절). 여기서도 우리 성경에는 “아담”이라고 하였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정관사가 붙은 ‘하 아담’이라고 표현한다. 즉 단순히 첫 사람 ‘아담’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인간 아담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그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직역하면 ‘그 사람이 그의 여자 하와를 알고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고 여호와와 함께 남자를 얻었다’라는 말이다.
“가인”(히, ‘카인)이란 ‘소유’라는 뜻이다. “낳고”(히, ‘야라드’)라는 말은 ‘(아이를) 낳다, 생기게 하다, 출산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이다(여기서 ‘톨레도트’라는 말이 나왔다). 아들을 낳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고자 하신 역사(톨레도트)를 이끌어 가고자 하신다. 남자와 여자는 가인을 통해 남자를 기대하는 상태였고 그 남자를 통해 여호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2-5a절). 여호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사람이 다음 아들을 낳고는 ‘헛됨, 허무’라는 뜻의 “아벨”(히, ‘헤벨’)이라고 명한다.
“농사하는 자”란 히브리어로 ‘아바드 아다마’인데 직역하면 ‘땅을 섬기는 자’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에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와예히(하야) 미케츠(케츠) 야밈(욤)’이라는 말인데 직역하면 ‘날의 끝에’라는 말이다. “땅의 소산”(히, ‘페리 아다마’)이란 ‘땅의 열매’라는 뜻이고, “제물”(히, ‘민하’)이란 ‘선물, 공물, 제사 제물’이란 뜻이다.
또 우리 성경에 “양”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촌’이란 ‘작은 가축, 양과 염소(떼)’라는 뜻이고, “치는”이라는 말은 ‘풀을 뜯기다, 먹이다, 사귀다’라는 뜻이다. “드렸고, 드렸더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보’인데 ‘들어가다, 나오다, 가다, 오다’라는 뜻이다. “첫 새끼”(히, ‘베코라’)는 ‘처음 낳은 것, 장자권’이라는 뜻이다. “받으셨으나”(히, ‘샤아’)라는 말은 ‘응시하다, 바라보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그가 또 카인의 형제 헤벨을 낳았는데 헤벨은 양(염소)에게 풀을 먹이는 자였고, 카인은 땅을 섬기는 자였다. 날의 끝에 카인은 땅의 열매를 여호와께 선물로 가지고 들어갔고 헤벨은 양의 처음 것과 기름을 가지고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헤벨과 그 선물은 눈여겨 보셨으나 가인과 그 선물은 보시지 않으셨다’라는 말이다.
흔히 이 본문에서 표현되는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 때문에 혹자는 하나님께서는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받으시는데 그 사람을 받는다는 의미는 인격을 의미하고 인격은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행위라고 해석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상상을 동원한 해석에 불과하다. 본문은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선물이란 우리가 얻으려고 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 의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막에서도 제사 제물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있게 하신 은혜로 약속의 땅에서 얻은 선물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을 잡아 제사 제물로 쓰지만 그것은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톨레도트(역사)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가인을 통해 여호와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고 땅을 섬기는 자를 기대하였으나 아벨을 통해 그것은 헛된 것이고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동물을 잡아 제사를 하는 피 흘림을 유추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이 동원된 무리한 해석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께 어떤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본문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말씀하는 것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히브리서는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믿음의 실상을 바라는 것이고 보이는 않는 것의 증거가 믿음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보이는 모든 것들은 실상이 아니다. 하늘의 실상이 증거로 드러난 것이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인이시다. 그분만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가인의 제사는 조금 못한 것이었지만 아벨의 제사를 가인보다는 좀 더 좋은 제사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땅의 열매를 가지고 행한 가인의 제사보다 하늘의 것을 드러내는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라는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제사였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들어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하나되는 것은 처음 것의 기름으로 여호와와 하나 될 수 있다는 복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 이후 제사 제도 속에서 하나님은 기름, 피를 철저히 구분하게 하신다. 그것은 인간이 처리하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피 흘리는 죽음을 통해 이루시는 생명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6절).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제 “여호와”라는 표현이 바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1-2:3의 주어는 ‘엘로힘’이었고, 2:4-24까지에서 주어는 ‘여호와 엘로힘’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여호와’로 표현된다. 성경에서는 자연스럽게 ‘여호와’라는 표현을 계속 쓰고는 있지만 실제 하나님께서 ‘여호와’에 대해 알려주신 것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처음 나타나셨을 때 출애굽기 3:14에서이다. ‘엘로힘’이든 ‘여호와’든 ‘여호와 엘로힘’이든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보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은 중요한 주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냥 쉽게 넘길 문제는 아니다.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1-2)
“여호와의 사자”란 히브리어로 ‘말라크 여호와’인데 ‘여호와가 말라크’라는 뜻이다. ‘사자’란 보내신 분이 있고 보내신 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는 뜻이다. ‘여호와’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직역하면 ‘나는 나다’라는 말이다. 하나님만 존재하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모든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땅의 존재는 다 죽음이고 하나님만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여호와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부르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약속으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인에게 벌주고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인을 통해 복음을 말씀하시고 생명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여기서 성경에 “죄”라는 ‘핫타트’(원형 ‘핫타아’)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데 ‘벗어나다, 어긋나다. 빗나가다, 침범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타’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무조건 죄에 대해 정의할 것이 아니라 앞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먼저 봐야 할 것이다. 2:18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토브’와 대조되는 의미로 썼다. 그렇다면 “선”이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창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것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교회인 여자는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못하고 교회만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악이고 죄이다. 이런 점에서 가인이 분노하였다는 것은 아벨과 그 제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거부하면서 땅의 열매로 하나님께 들어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이런 가인의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 종교 행위로 땅의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죄이고 악이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라는 말씀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선이 없다면 죄가 다스리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문”(히, ‘페타흐’)이란 ‘말이 나오는 입, 소리를 내는 목구멍’이라는 뜻이고, “엎드려 있느니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로베츠’(라바츠)는 ‘누워서 쉬는 곳, 엎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좋은 의미로 안식처가 될 수 있지만 죄라는측면에서 보자면 ‘죄가 누워서 쉬는 무덤’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에서 히브리어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없다. 우리 성경의 표현으로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 힘든데 직역하면 ‘너는 원하여(하나되어) 다스림에 있게 된다’라는 말이다.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라고 하셨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겉으로는 안식처 같이 아름답게 보이나 죽음이 가득한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죄인의 실상이라는 것을 가인을 통해 폭로하면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실 것을 보여주신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다(202211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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