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론 20
창세기 3:17-20
저주 아래의 땅
어떤 운동선수가 자서전에 “창세기 3장을 읽고 아내가 출산할 때 무통분만을 하지 말자고 이야기했다”라는 간증을 하였다. 이것이 기사가 되어 한동안 논란이 있었는데 문제는 이것이 한국 교회 많은 교인의 성경 이해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결혼을 하지 않고 자녀를 낳지 않는 여자는 이 고통과 저주에서 해방된 것인가? 또 얼굴에 땀을 흘러야 한다고 말씀한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늘 땀 흘리고 수고하는 것이 죄인에게는 당연하고 그렇게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진짜 그런 의미인가?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는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저주에서 제외된 사람들인가?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곧 율법주의로 이어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고통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씀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부분은 한국 교회가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하였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16절)라는 말씀에서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고통과 임신을 더하고 더하리라’라는 말이다. “낳을 것이며”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라드’는 ‘(아이를)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 진통하다’라는 뜻으로 이 말에서 ‘톨레도트’(역사, 족보)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창세기가 열 개의 톨레도트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들을 낳는 역사로 기록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어는 “내가”라는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고통과 임신을 더하게 하셔서 해산의 수고로 아들을 얻도록 하심이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1-5)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하나님은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에게 맛 좀 보라는 식으로 저주를 내리고 인간 역사 대대로 고통스럽게 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고통으로 출산하는 것을 감내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여자인 교회가 저주 아래 고통 중에서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을 얻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해산하는 얻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를 ‘톨레도트’로 나타내고 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7절). “저주”란 특별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무엇인가를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 없이 땅에 갇혀 땅의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땅의 존재 자체가 저주이다. 2:3에서 “안식”을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대조한 표현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 아래 놓이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그 저주의 상태를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이때부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평생 먹고사는 것으로 인해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살아 있는 모든 날들의 수고로 먹는다’라는 말이다. “수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잇차본’인데 ‘아픔, 고통, 노역, 수고’라는 뜻을 지닌다. 창세기 5:29에서 이 단어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 5:29)
땅의 저주 상태에서 수고롭게 일하는 것이 “안위”를 지향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노아’라는 이름은 ‘누아흐’(쉬다, 안식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수고”하는 것으로 ‘노아’가 이룰 안식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자가 교회이고 아담(남자)가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시는 것이라면 이 말씀은 단순히 아담이 고생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로 먹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주 아래 있는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이제 고생하고 고통 중에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갈라디아서 말씀만 보면 아들을 얻는 해산하는 수고가 바울 자신이 한 것처럼 이해될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를 비롯해서 다른 서신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참고 골 1:29, 고후 11:2). 해산한다는 것은 교회가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수고가 결코 자신의 수고가 아니라고 밝혔다. 결국 “내가 나 된 것”(헬, ‘에고 에이미’),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은 자신의 수고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18절). 이제 저주 아래 있는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기에 땅적 존재가 취할 것은 들의 채소뿐이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상징되는 ‘길 가, 흙이 얇은 돌밭, 가시떨기’의 땅을 좋은 땅으로 바꾸어 씨를 뿌리시는 분에 의해 그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말씀에 의해 얻는 후손 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하나님 왕국이다(마 1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9절). 히브리어 ‘슈브’를 우리 성경에 “돌아갈 때까지”,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회복시키다, 새롭게 살려내다, 구원하다’라는 뜻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슈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슈브)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시 35:1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슈브)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나 2:2)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흙으로”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웨엘 아파르’라는 말인데 2:19에서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라는 말씀에서 단순히 “그에게”가 아니라 ‘아담 안에서’(‘엘 하아담’)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었다. 여기서도 같은 단어로 쓰였다. 단순히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흙 안으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직역하면 ‘너는 흙(먼지)이 되어 그 흙(먼지) 안으로 들어가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이다. 즉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지와 같은 땅적 존재인 자기 백성 안에 찾아오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이제까지의 모든 말씀을 아담은 단순히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해하였기에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20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도 “아내”라는 표현은 없고 ‘여자’로 표현하였다. 즉 여자를 “하와”라고 칭하는데 히브리어 ‘하우와’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였다는 것은 비록 땅은 저주 아래 있지만 계속 생명을 해산하여 얻는 어머니의 역할을 교회가 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땅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용납하지 않는 곳이었다. 땅의 존재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에서 ‘베레쉬트’를 통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그 언약의 말씀을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셔서 머리 둘 곳을 스스로 정하시고 그 영(성령님)을 넘겨주시는 일까지 이루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의 날’로 찾아오셔서 보여주신 언약이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저주가 없는 하나님 왕국, 그것이 언약의 온전한 성취이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 22:1-4)
(2022103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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