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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교회와 헌금-헌금인가 연보인가?

불편한 진리 2021. 10. 17. 13:45

https://youtu.be/WK59gtsdVbA

https://youtu.be/ZHCmo904dJ4

 

교회와 헌금

- 헌금인가 연보인가? -

 

들어가는 말

 

1997년 3월에 주성교회로 첫 모임을 하면서 어떤 곳에도 후원을 요청하지 않았었다. 교회는 돈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나타내고 싶었다. 사람이 있든 없든 복음을 사모하고 나누는 마음으로 모여지기를 원했다. 오늘날 교회들의 재정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는 말씀을 나누는 모임이었기에 현실적으로 모임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모임에서 필요한 경비가 소요되는 것을 위해 자유롭게 하는 헌금으로 유지하였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분들 가운데 헌금보다 연보가 더 성경적인 용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일까? 그래서 헌금과 연보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하면서도 용어 사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언젠가 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 있어 성경을 다시 찬찬히 살피게 되었고 사람이 모이는 교회라는 모임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교회란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6-18)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대조하여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이다’(18절)라고 선포하셨다. 시몬에게 ‘게바’(바위)라는 이름을 주셨는데(요 1:42) 이는 아람어이고 헬라어로는 ‘페트로스’(돌멩이)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이 당시에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름을 붙여 주셨다. 그 의도는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시몬에게 돌멩이(페트로스)라는 이름을 부여하신 이유는 그가 반석(페트라)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었다. ‘페트로스’는 남성 명사로서 ‘돌멩이’라는 뜻이고 ‘페트라’는 여성 명사로서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부여하고자 한 이름은 바위라는 페트라였겠지만 이 단어는 여성형이었기 때문에 남자인 시몬에게 적절하지 않았으므로 남성형인 페트로스를 부여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부여된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에게 국한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사실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인 반석으로 불리게 된 것은 베드로의 성품이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가 열두 제자의 대표로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반석으로써의 기능은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을 열두 제자들이 모두 함께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히브리어 ‘카할’(회중, 공동체)을 번역한 말인데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교회란 기본적으로 회중 혹은 공동체라는 뜻을 가지고 언약적 의미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지칭하는 언약의 성취자와 그에 속한 자를 의미한다(갈 3:16, 3:29).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은 구약 열두 지파의 실패를 보여주고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 곧 교회를 세우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 분명하다(참고 마 19:28, 21:43).

또한 “내 교회를 세우리니”(18절)라는 말씀에서 ‘세우다’(오이코도메오)라는 표현은 구약 특히 다윗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집으로 세운다는 비유적 표현들을 배경으로 사용하셨다(삼하 7:1-29, 룻 4:11, 렘 1:10, 31:4, 33:7 등). 이런 점에서 교회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유(내 교회)로 친히 세우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그분이 다 이루신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며 그의 몸이다(엡 1:22-23,5:23,30, 골 1:18).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우신 자신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 즉 ‘하데스의 문들’(philai hadu)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구약에서 ‘스올의 문들’(사 38:10 등)을 번역한 것으로 ‘죽음의 문들’(욥 38:17, 시 9:13, 107:18 등)을 의미하는데 ‘문들’은 보통 ‘세력’, ‘권세’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데스의 문들이란 곧 죽음의 세력, 권세를 뜻하며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은 사탄의 권세에 속하여 죽음을 겪는 상태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루실 약속이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님의 몸으로 함께 십자가에 죽고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이 교회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설파하였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3-5)

 

그런데 문제는 이 십자가의 죽음과 살아남이 한 번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그렇다면 단순히 예수 믿는다고 모인 무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날마다 죽고 살아나는 경험이 있는 자를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인 교회란 말씀이 선포되고 나누어짐으로 날마다 말씀에 의해 발생되는 교회이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라고 간판을 걸어 놓으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란 구원 받기 위해 대기하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란 내 머리가 잘려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교체된 하나의 몸이다(엡 1:10, 계 20:4). 그럴 때 그 교회란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해 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주께서 지상에 말씀으로 하나님 왕국을 나타내고 보여줄 수단이 교회이다.

 

제사와 제물 - 예배와 헌금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자면 구약의 제사가 오늘날의 예배라고 할 수 있을까? 구약의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렇게 보자면 단순히 구약의 제사가 신약 이후에는 예배로 대체되었고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듯이 오늘날 예배에 헌물이라는 헌금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예배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을 헌물로 드린 것과 같이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물과 같은 헌금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왜곡된 것이다. 그러니 성막 또는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바친 것이 오늘날 건축 헌금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분들 중에서도 구약의 제사가 오늘날 예배로 대체 되었는데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나와야 하기 때문에 이제 헌물이나 헌금이 아닌 연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르침의 의도는 모든 예배 시간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하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알겠지만 예배에 연보를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폐지인가 완성인가?

 

구약의 제사는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헌금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십일조는 헌금이 아니다. 십일조는 열 개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을 하나로 대표하는 것이다. 즉 구약의 십일조는 맏물로서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폐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이다(지면상 여기서는 더 설명할 수가 없으니 더 구체적으로 참고하기를 원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일조”에 대한 저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면 이제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반문을 한다. 이런 물음이 나오는 이유는 이제까지 십일조를 헌금으로만 생각하고 돈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완성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십일조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헌금의 방식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 또한 하지 말자는 율법이 된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일조가 된 것이다.

 

과부의 두 렙돈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헌금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 과연 헌금이라는 말보다 연보라는 말이 더 성경적인가? 그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흔히 아름다운 칭찬으로 알고 있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대한 말씀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으므로 우리는 과부와 같이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칠 줄 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교회 생활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 것인가? 아니 성경 본문이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 마가복음 12:41-44(눅 21:1-4)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1-44)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문맥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막 11:1-11).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막 11:12-25). 그러자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물리치시고는(막 11:27-12:37) 서기관들에 대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막 12:40)라고 폭로하셨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러한 헌금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라고 말씀하셨다. 즉 성전으로 상징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문맥 가운데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두 렙돈 헌금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으로 희생되고 있는 사례를 말씀하신 것이다.

‘렙돈’은 가장 작은 돈의 단위로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로마 돈)에 해당된다. “생활비”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비오스’라는 말인데 ‘생애, 생의 기간’을 의미한다. 즉 과부는 가장 적은 금액을 성전에 헌금하였지만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은 두 렙돈으로 상징된 과부의 생존 전체를 삼키는 탐욕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탐욕을 폭로하시고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고 오늘날 우리에게 생활비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과부와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다. 성전의 실체는 예수님 자신(마 12:6, 요 2:19-21)이기에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는 성전은 무너뜨릴 것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종교 놀이의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것이었다.

 

헌금과 연보

 

‘헌금’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기독교에서 주일이나 축일에 하나님에게 돈을 바침. 또는 그 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자의 뜻을 보면 ‘헌’(獻)자는 ‘바치다,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금’(金)은 ‘돈’을 의미하니까 그렇다면 돈을 하나님께 바친다, 혹은 돈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연보’라는 말은 어떤가? 한자의 표현을 보면 ‘버리다, 없애다,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연’(捐)과 ‘깁다, 고이다, 보수하다, 더하다, 돕다’라는 ‘보’(補)의 합성어이다. 사전적인 뜻으로는 “자기의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줌” 혹은 “기독교에서 주일이나 축일에 하나님에게 돈을 바침. 또는 그 돈”이라고 풀이한다. 두 번째 정의는 차치하고 첫 번째 정의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자기의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성도에게 자기의 재물이 있는가? 자기의 재물이 있다는 것은 성도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결국 헌금이나 연보란 같은 뜻의 말이다. 용어를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좋은 표현이냐 혹은 성경적인 표현이냐 라고 가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 용어에 대한 정의를 사전적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 의미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서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연보란 말은 개역개정 성경에서 9번 나오는데 헬라어로는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괄호에 넣어 병기 하였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코이노니아)하였음이라(롬 15:26)

 

성도를 위하는 연보(로기아)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로기아)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하플로테스)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하드로테스)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20)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율로기아)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율로기아)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하플로테스)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 9:11)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하플로테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로마서 15:26에서는 ‘코이노니아’(G2842 : 교제, 참여, 나누어줌),

고린도전서 16:1-2에서 2번 ‘로기아’(G3048 : 수금, 기부금),

고린도후서 8:2, 고린도후서 9:11, 고린도후서 9:13에서 ‘하플로테스’(G572 : 순진, 성실, 정직함),

고린도후서 8:20에서는 ‘하드로테스’(G100 : 두꺼움, 풍성함, 많은),

고린도후서 9:5에서 2번, ‘율로기아’(G2129 : 찬양, 축복, 복)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 성경에는 다 연보로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는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의미는 연보가 돈이라는 것에 한정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연보라는 것이 어떤 형식으로 제도화된 용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돈으로 헌금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늘의 복이며 십자가의 은혜이기에 그것을 서로 나누고 교제하는 것을 연보로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로기아’(수금, 기부금)를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6:1-2의 말씀조차도 결코 돈으로 하는 헌금을 강조하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고린도전서는 14장에 이르기까지 고린도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인 음행과 성적인 문제, 성찬에 대한 문제, 은사에 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15장에 와서 복음을 부활로 설명하게 된 것은 복음을 안다는 것이 단순히 내가 복음을 알기 때문에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 세계 즉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점에서 16장을 이해할 때도 바울의 개인적인 문안 인사나 헌금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이제까지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 선포의 문맥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5:58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하였다. “주의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16:1 이하이다. 즉 “주의 일”이란 주께서 행하신 일이고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3절에서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하였다. 단순히 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눈다는 차원이다.

또한 여기 2절에서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초대교회는 의도적으로 주님이 부활하신 매주일에 모였기 때문에 우리가 일요일에 모여야 하고 또한 예배 때는 반드시 헌금이 있어야 한다는 정당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매주 첫날”이란 ‘매주 첫째 날마다’라는 의미이다. 초대교회는 거의 매일 모였기 때문에 그 중에서 연보는 매주 첫째 날에 한 것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2절)라는 말을 수동태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는 말이다. 결국 교회라는 모임에서 돈을 내는 것을 가지고 헌금이라는 말보다 연보라는 말이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나오는 말 - 모임을 위한 제안

 

오늘날 교회들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헌금 강요하는 것을 아주 정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의 것을 일체 받지 않는 분이다.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기뻐 받으시며 그 십자가만 영광으로 삼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마 3:17, 17:5). 단언컨대 하나님은 인간의 돈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말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행위(행 2:44-45)가 나타나는 것이 교회이고 이런 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재현해 내도록 힘써 헌금을 하는 것이 교회다운 교회라고 말이다. 사도행전의 모습은 성령이 임하니 말씀에 의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없었다는 복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헌금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였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다. 그렇다면 주성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할 수 없다. 주성교회 안에 주님의 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성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 왕국이다. 그렇다면 주성교회란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자들의 모임에 불과하다. 죄인들이 모인다는 것에서만 본다면 그저 세상의 동호회나 친목회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말씀이 선포되고 나누어지면 그 말씀에 굴복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말씀의 권세가 나타난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인 교회요 성도이다.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 자체는 거룩한 교회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 속에는 그런 의미를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용어를 차용하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교회를 표현하였다. 그러기에 주성교회라는 모임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됨의 더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이 땅에서의 모임에서 운영하기 위한 운영비 혹은 관리비는 회(會)에 필요한 경비를 모으는 것으로 ‘회비’에 불과한 것이지 헌금이나 연보라고 하여 또 다르게 구별하면서 의미를 부여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세상의 힘을 흩어버리고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모임이고 성도여야 하지 않을까?(20211010/주성교회 김영대).

 

20211010 교회와 헌금-헌금인가 연보인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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