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마태복음 8:1-4 깨끗함을 받으라

불편한 진리 2022. 4. 2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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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 04_나병환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8:1-4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적은 마태복음 8:1-4, 마가복음 1:40-45, 누가복음 5:12-16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마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마태가 문맥 속에서 이 이적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서보다 더 선명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들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서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록자에 따라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를 성령의 감동을 따라 적절한 문맥 속에 배치하였다.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시간적인 순서로 정리해 보자면 본 이적은 예수님의 공생애 1차년도 사역에 있었고 산상수훈은 2차년도 사역에 선포된 말씀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이적을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연결된 문맥 속에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산상수훈과 연관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가는 이 이적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것으로 폭넓게 밝히고 있고 누가는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5:12)라고 하였지만, 마태는 본문 1절에서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라고 언급하였다. 마태복음의 1차독자는 유대인이라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모세오경을 연상시키는 5개의 강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예수님의 이적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기록하였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율법을 선포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율법의 본질을 밝히며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신 산상수훈 이후 가장 먼저 행하신 것으로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적을 연결시킨다.

산상수훈을 들었던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놀랐다는 것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단순히 모세 율법을 행하라는 차원이 아니었다. “놀라니”(7:28)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난 것으로 인한 놀라움이다(참고 눅 9:43, 13:12). 유대인들은 이제까지 율법으로 쌓아놓은 것들로 천국 가려고 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제까지 인간이 자기 의로 쌓아 천국에 가려고 하는 인간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단순히 놀라움 정도가 아니라 이제까지 쌓아놓은 자기의 의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자신의 힘이나 의로써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본문에 보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후 제일 먼저 나병환자를 만나셨고 고치신 것이 의도적이셨다. 마태가 이렇게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마태복음 전체를 모세오경의 유형으로 구성하여 예수님을 애굽 왕 바로의 치하에서 강에 던져 죽임을 당할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모세와 같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헤롯 왕에게서 죽임을 당할 위기의 내용을 기록하였고 또한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한 예수님의 모습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온전히 물리치신 모습으로 나타내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 아니 모세보다 우월하신 왕으로 드러내면서 산상수훈을 선포하는 것으로 본문을 구성하여 기록하였다.

모세오경의 권위 아래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예수님의 왕적 권위를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렇게 본문을 배치하였다. 이런 5분법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문학구조 방식이었다. 율법서가 5경이며 시편도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마태복음을 유대인들이 익숙한 모세오경의 율법서 형태로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자.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9: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 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51:25)

 

그 외에도 이사야 40:4, 41:15, 미가 1:4, 아모스 9:13 등의 말씀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산을 무너뜨리거나 평탄하게 하거나 녹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옮기고 부수고 낮게 하시는 산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산들을 향하여 이렇게 일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산이 이나 권세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파괴하고 무너뜨리시는 이 산들은 때로는 나라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세자들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에 도전하는 세상적 힘과 권세들을 파하신다는 의미를 산을 무너뜨리는 비유로 표현하였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2:2)

 

그리고 또 성경에서 산은 대부분 성전이나 하나님께서 계신 곳하나님의 임하심과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게 함은 앞으로 오실 언약의 실체를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으며(22:1-19),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고 계명을 주셨으며(19:20), 성전은 모리아 산 곧 예루살렘 산에 건축되었고(대하 3:1), 말씀 즉 거룩한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오며(4:2, 2:6, 14:7) 거기서 주어지는 것이 복이며 영생이라고 하였다(133:3). 또한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화하심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셨다(17:1-8).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성경에서 산은 세력이나 권세 또는 하나님께서 임하신다는 상징적인 장소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임하심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상적인 권세나 세력으로 나타날 때에는 가차없이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것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베푸신 시내 산에서의 사건을 재현하면서 아니 그 본질적인 원형임을 드러내면서 언약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새로운 모세로 또한 왕권을 가진 메시아로서 율법의 완성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산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드러내셨다.

그런데 이제 그 산에서 내려오셨다. 산에서 말씀을 선포하셨고 마쳤으니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식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셔서 그다음에 하신 일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셨다는 일에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셔서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가?

바로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이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2-3). 그리고는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4)라고 하셨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이 나병환자에 대한 진단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다.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13:2-3)

 

나병환자로 진단이 되면 진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5:2-3). 그러다가 깨끗하게 되면 제사장은 진 밖으로 나가 진단하고 정결한 새 두 마리를 취하여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그 피를 찍어 나병환자에게 7번 뿌리고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아준 후 자기 장막 밖에서 7일을 거하였다가(14:1-9) 8일째 되는 날에 제사를 하는데 흠 없는 어린 숫양을 기름과 함께 속건제로 지낸다.

그리고 또 한 마리의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속죄제로 드린 후에 속건제로 드린 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하게 된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엄지 손가락과 엄지 발가락에 바르는데(14:10-20) 이는 제사장 위임식과 같은 제사의 형식이다(29:20, 8:23). 즉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것은 제사장과 같은 상태가 되어 제사장과 하나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단순히 제사장에게 확실한 진단을 받아서 진짜 제대로 나았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진단을 받는 과정을 통해 진짜 제사장이 누구인지 그리고 깨끗함을 얻은 후에 드리는 제사를 통해 그 제사의 제물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알라는 것이었다.

인간 제사장은 나병환자를 보고 진단을 내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단순히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는 것이 대단한 이적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 나병환자를 이렇게 부정한 자로 죄인의 상태를 계시해 주신 것은 나병환자가 썩고 죽어가는 그 증상을 통해 죄의 실상에 대하여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그들이 곧 율법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임을 폭로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그 권위에 압도 되었지만 예수님을 반석으로 또한 그 위에 세워진 집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고 또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원하셔야만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죄에서 깨끗함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나타내셨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었다. 즉 나병환자와 같은 죄인이 정결하게 깨끗함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친히 임하셨던 산에서 내려오셔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깨끗하게 하셔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으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본질적인 뜻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친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산에서 내려오신 것이었다. 모세와 언약을 맺기 위해 산에 임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산에서 내려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었고 원하심이었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공관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3/1:41/5:13) 고치셨다고 기록하였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의미한다(15:6,9,12,17, 8:31 ). 즉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 죄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다. 그래서 깨끗함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안에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자기 백성들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로 정결하게 만드시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써만 가능하고 그 죽음에 합류된 자의 깨끗함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이런 점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적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의 능력 안에 있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곧 십자가의 능력이다(202204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